시누이, 여진

by roun

정은과 성호의 아이가 첫 돌을 맞을 무렵, 시댁은 딸 여진의 결혼 준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성호의 집은 아버지가 근무하던 공장 한쪽에 지은 작은 컨테이너 조립식 주택이었다.


성호, 정호, 여진 남매는 그곳에서 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부모님 두 분만 남게 되자 더더욱 이사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딸 여진의 결혼을 앞두고 상황이 달라졌다.

예비 사위가 인사 오는데, 딸 여진의 집이 변변치 않다며 무시당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성호의 부모님은 끝내 이사를 결심했다.
공장 옆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이, 처음으로 자기 명의의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입주를 앞두고 도배를 하기 위해 도배지를 고르던 날, 시어머니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설렘이 떠올라 있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나도 내 집이 생겼어!”

그 한마디에, 지난 세월의 서러움이 묻어 있었다.
정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저려왔다.


새 집으로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은 예비 남편과 함께 부모님 댁을 찾았다.

여진의 상견례 날짜가 잡히자 성호의 아버지는 눈에 띄게 들떠 있었다.

평소라면 약주를 드시는 날이 아니고서는 집과 공장밖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분이었다.
돈 쓰는 일에는 유난히 인색했고,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집 밖으로 나가면 다 돈이야. 돈!”


그렇게 단단한 성호의 아버지 마음을 녹이는 건, 오직 딸 여진뿐이었다.


성호의 아버지는 여진의 상견례에서 예비 사돈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값비싼 브랜드 양복을 맞춰 입고 아내에게도 화사하고 예쁜 옷을 기분 좋게 사주었다.

성호 어머니도 남편의 그런 모습에 얼떨떨한 눈치였다.

지금까지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딱 그만큼만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아 쓰느라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하고 항상 눈치만 보면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딸 여진이 결혼을 한다니 남편의 씀씀이가 이렇게 달라졌다! 성호 어머니는 지금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정은은 그런 시부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결혼을 준비할 때와의 상황이 너무 비교되어 속상했다.


딸 여진이 남편과 시댁에 무시당할까 떡하니 집을 사고, 상견례를 위해 비싼 브랜드 옷을 덥석 덥석 사 입으며 들뜬 마음으로 오매불망 사돈과 인사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걸 보자니 솔직히 속상한 정도가 아니라 속에서 천불이 났다.


여진의 결혼 후, 이전엔 자매처럼 잘 지내던 올케와 시누이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여진은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사업이 승승장구하여 돈방석에 앉았고, 정은은 크게 사기를 당해 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길바닥에 나 앉을 처지가 되었다.

여진은 그런 정은을 무시했고, 유치하다 싶을 만큼 사사건건 돈자랑을 늘어놓았다.

'돈이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는구나..' 예전의 청량하고 상냥했던 여진은 사라지고 지금은 당당하다 못해 무례한 시누이만 남아 있었다.

정은은 아이를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의 월급을 알뜰살뜰 관리했고 정은 자신에게는 100원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성호의 낡고 색 바랜 티셔츠는 버리지 않고 정은이 입었다.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바득 바득 참아가며 악착같이 곗돈을 부었다.

정은의 친정 엄마가 오랫동안 계원으로 있던 모임이라 정은은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두 개의 계는 어느새 다섯 개, 여섯 개가 되었고 곗돈 붓는 것이 버거웠지만 버티고 또 버텼다.

정은이 곗돈을 탈 차례가 다가오자 계모임이 깨지고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그 안엔 정은의 엄마도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정은은 배신감과 절망감 사이에서 우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울기만 하던 정은을 정신 차리게 한 건, 아이였다.

정은은 혼란스럽고 막막했지만 당장 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길바닥에 나 앉을 순 없었다.

지낼 곳을 찾아야만 했다.

보란 듯이 잘 살겠다며 마음속으로 수백 번, 수천 번 다짐하고 칼을 갈아왔던 정은이기에 우리에게 닥쳐온 불행을 시부모에게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정은은 고민 끝에 오랜 시간 연락을 끊고 지내던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정은이니? 정은아, 어디야. 정은이 무슨 일 있니?"


정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매몰차게 전화를 끊거나, 예전처럼 호되게 호통을 칠 줄 알았던 아빠는 낮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정은의 이름을 부르며 걱정했다.

아빠의 휴대폰 액정에 정은의 이름이 뜨는 순간, 아빠는 이미 무언가를 직감한 것 같았다.


"정은아, 아빠한테 와."


정은의 아빠는 두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나한테 아빠 말 안 듣고 엄마한테 가더니, 잘하는 짓이다! 소리 지르고 욕을 하지..' 정은은 예상하지 못했던 아빠의 태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도망치듯 떠나온 그 집을 정은은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다시 찾았다.

할머니가 곱게 맞아줄 리 없었다.

정은은 언젠가 아빠와 다시 만날 날을 가끔씩 상상했었다.

양손 가득 선물 보따리를 들고 웃으며 아빠 품으로 달려가는 자신을 모습을..

내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더라면 그 시절, 변덕이 죽을 끓고 나를 시도 때도 없이 구박하던 할머니도 못 이긴 척 반겨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정은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우리 세 식구가 몸을 뉘일 공간만 있어도 감사한 일이었다.


정은의 가족이 할머니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모든 일이 들통나고 말았다.

정은의 엄마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시부모는 기막혀했다.

가뜩이나 기 한번 못 펴는 결혼생활, 시집살이인데 차라리 딸 편들어 노발대발 난리라도 치지 말지 나를 더 못 살게 하는 건 정작 엄마였으면서.. 정은은 시부모님의 역성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정은의 형편을 알고 시누이 여진은 유독 있는 티를 더 냈다.

초라함에 움츠러드는 올케 정은을 보며, 그 모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 갑자기 돈을 많이 벌면 이렇게 바뀔 수도 있구나..' 정은은 돈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다.


정은이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누이 여진이 첫 아이를 임신했다.

정은은 자신의 친정 배경과 곗돈 사건으로 시댁에 제대로 찍혀, 돈 주고 부리는 가정부만도 못한 처지가 됐다.

시누이 여진이 친정에 가면 올케 정은도 당연히 따라나서야 했고 그렇게 한번 시댁에 가면 보름을 꽉 채우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시누이 여진과 이야기를 나누다 늦은 새벽이 되어 잠이 들었다.

늦은 시간까지 말소리가 거실로 새어 나가자 시어머니는 그만 떠들고 빨리 자라며 타박했다.

동이 트자, 시어머니는 정은과 여진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와 딸 여진이 잠에서 깰까 조심스럽게 며느리 정은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깨웠다.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잠이 덜 깬 정은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여진이 깨니까 조용히 해. 아침밥 해야 하니까 잠 깨라. 얼른!"


시어머니 말씀에 정은은 주방으로 나와 쌀을 씻고 밥을 안쳤다.


찌개를 끓이고 밑반찬 몇 가지를 준비한 후, 정은은 거실 소파에 잠시 기대어 앉았다.


정은의 볼록한 배 위로 갑자기 빨래 더미가 떨어졌다.


정은은 아무 말없이 묵묵히 빨래를 개켜 제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시어머니는 잠들어 있는 딸 여진을 조심스럽게 깨웠다.


"여진아, 일어나. 밥 먹어야지."


여진은 비몽사몽 한 얼굴로 상 앞에 앉아 밥을 한술 떴다.


식사가 계속되던 중, 갑자기 정은의 아이가 고모 여진의 밥그릇을 빼앗았다.


"예빈아, 하지 마!"


짜증이 난 여진은 날이 선 말투로 정은의 아이에게 쏘아붙이며 말했지만 정은의 아이는 해맑은 얼굴로 다시 고모 여진의 밥그릇을 빼앗았다.


"예빈아, 버릇없이 뭐 하는 행동이야! 엄마한테 혼나!"


정은도 아이를 혼냈다.


그 순간, 갑자기 아이의 얼굴로 숟가락이 날아왔다.


정은은 너무 놀라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야! 고모가 하지 말라고 말했지! 아씨 짜증 나!"


시누이 여진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세차게 닫고 들어가 버렸다.


정은은 놀란 아이를 꼭 끌어안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순간 많은 생각이 정은의 머릿속을 스쳤다.


정은의 아이가 잘못한 행동을 했기로서니, 아이의 얼굴로 숟가락이 날아올 일인가..


정은은 울먹이며 부랴 부랴 아이의 짐을 챙겼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행동이니?"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는 며느리 정은의 모습을 보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정은을 나무랐다.


"어머님, 저 더는 못 있을 것 같아요. 예빈이 데리고 갈게요."


정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시어머니에게 말했지만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해해라. 그래도 여진이가 뒤끝은 없잖니!"


시어머니는 딸 여진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며느리 정은의 태도만 나무랄 뿐, 정작 딸 여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은은 서러움에 자신의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시간이 지나자 시누이 여진은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걸고 조카 예빈과 놀아 주었다.

정은의 속만 시커멓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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