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의 겨울

by roun

정은의 시어머니가 딸 여진의 집을 찾는 날은 부쩍 늘어났다.

여진은 아기를 봐 달라며 친정 엄마를 불러 놓고, 남편이 퇴근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오빠 성호의 집으로 어머니를 보냈다.


"엄마, 승민이 아빠 곧 와. 오빠 집으로 가!"


자신을 데리러 오라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은 성호는 서둘러 퇴근하고 동생 여진의 집으로 향했다.

매부가 도착하기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야지, 자칫 시간을 못 맞춰서 매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동생 여진은 자신의 남편을 불편하게 했다고 난리를 피웠다.

정은도 성호와 함께 여진의 집으로 향했다.

정은과 성호는 우연한 기회에 작은 식당을 인수받아 1년 365일 쉬는 날도 없이 하루 종일 장사에 매달렸다.

이제 갓 돌을 넘긴 둘째 아기를 맡길 어린이집을 구하지 못해서 정은은 늘 아기를 업고 일했다.

그런 우리와 상의 한 마디 없이 친정 엄마를 불러 놓고, 어머니 모시고 가라고 저리도 당당히 말하니 뭐 이렇게 뻔뻔한 애가 다 있나 싶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정은만 할 뿐이었다.

남편 성호는 세상 좋은 게 좋은 사람이라 오히려 불평하는 정은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정은과 성호는 막 잠든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찬바람이 스며들지 않도록 담요로 아이들을 꽁꽁 감싸 쥐었다.

겨울바람은 살을 에듯 매서웠고, 길은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차도 없는 처지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여진의 집을 들러 시어머니를 모셔 와야 한다는 상황이 정은은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차 있는 사람은 도대체 뭐 해? 우리는 차도 없는데, 이렇게 추운 날 애기들 데리고 어머니 모시러 갈 일이야?"


정은의 불평에 성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성호는 늘 이런 식이니 답답해 죽는 쪽은 늘 정은이었다.


폭삭 망한 뒤 다시 일어서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할머니 집에 얹혀살던 정은보다, 이제는 손녀딸 예빈이 더 걱정이 되었던 친정아버지는 보험 대출까지 받아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할머니 눈치 보지 말고 작은 월세방이라도 하나 얻어."


정은은 그 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손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아빠, 미안해....."


그렇게 구한 집은 한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았다.

집과 집이 바짝 붙어 있어 바람도 통하지 않았고, 방음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거실이라 부르기 민망한 공간에 작은 주방과 욕실이 전부인 원룸.

반면 여진의 집은 3층이라 해도 잘 들고 방도 3개나 있어 정은의 눈엔 궁궐처럼 느껴지는 집이었다. 그래서 여진의 행동이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방이 세 개나 되는데, 굳이 이 좁아터진 집으로 어머니를 보내는 건 무슨 심보야.”


정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엄마, 승민이 아빠 출근했어. 빨리 우리 집으로 와.”


여진은 남편이 집을 나서자마자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재촉했다.

여진이 ‘친정 엄마 찬스’를 쓰는 날이면, 정은은 자동으로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여진의 심보는 날이 갈수록 노골적이었다.

새 차를 사기 전 시승을 하는 날에도 굳이 자기 집 앞이 아닌, 정은과 성호가 일하는 식당 앞으로 차를 가져오게 했다.

시승을 핑계 삼아 은근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랑하고 싶은 티가 너무 났다.

아기 장난감을 새로 사면 여진은 또 정은을 불렀다.


"언니! 우빈이 장난감 없지? 애가 가지고 놀 것도 없으니 얼마나 불쌍해. 승민이 장난감 새로 샀으니까 데리고 와. 같이 놀게~"


조카 우빈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여진의 말에는 언제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 시선이 자신의 아이에게 향한다고 생각하자 정은의 마음 한쪽이 서늘하게 아려왔다.

정은은 말없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체온이 손바닥에 고여 들었다.


"아가야, 엄마가 미안해....."


그 말은 아이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건네는 사과처럼 낮게 흘러나왔다.

정은에게 여진은, 더는 애써 좋게 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밉상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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