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운명의 시험대
봄바람이 살짝 불던 저녁, 선우와 보영은 강변을 걸었다.
노을빛이 강물 위에 번져 있었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다.” 보영이 미소를 지었다.
선우는 그녀의 손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쥐여주며 말했다.
“일 얘기는 잠깐 잊자. 지금은… 그냥 우리 둘만.”
보영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광고 카피 대신 나랑 대화해주는건가?“
선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네가 내 원고야. 한 줄도 놓치고 싶지 않아.”
보영은 미소지었다.
“우리 여행가자. 바다보고 싶다.” 보영은 그동안 일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그럴까?”
“남쪽 끝 땅끝마을 가볼까?”
“너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선우는 대답했다.
둘은 작은 포장마차에 들러 어묵을 나눠 먹었다.
포장마차 안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국물 냄새와 튀김 냄새가 뒤섞여 따뜻한 공기를 만들고 있었다.
옆자리에서는 직장인들이 소주잔을 부딪치며 웃고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비닐 천막이 포장마차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를 더했다.
보영은 따끈한 국물을 마시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국물이 진하고 해물향이 많이 나네. 맛있다.”
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이거 먹고 나면 얼굴 붓는 거 아냐?”
보영은 장난스럽게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응, 그래서 내일은 물 많이 마시고 두 배는 더 뛰어야지. 다이어트가 뭔지… 사람 잡는다니까. 그
래도 스트레스성 폭식보다는 가끔 이렇게 먹는 게 낫지.”
선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속삭였다.
“너무 예뻐지면 곤란한데…”
보영은 무슨 말인가 싶어 선우를 쳐다봤다.
“왜?”
선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더 예뻐지면… 너가 도망갈까봐.”
보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도 참…”
잠시 바람이 스치고, 포장마차의 따뜻한 불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천막 밖으로는 겨울바람이 차갑게 불었지만, 안쪽은 국물 냄새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보영은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며 조용히 말했다.
“포장마차에서 데이트하니까 좋다. 마음이 편해.”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속삭였다.
“네가 웃는 게… 나한테는 제일 큰 선물이야.”
보영은 방긋 웃으며 그의 눈빛을 받아주었다.
포장마차의 소란스러움은 멀리 사라지고 두 사람만이 남은 듯했다
그 순간, 바람이 불며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보영은 장난스럽게 선우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이런 순간이 오래 갔으면 좋겠다.”
경기도의 한 화장품 광고 촬영 현장.
보영은 은은한 아이보리 빛깔의 롱드레스를 입은채 비비크림을 바르면서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조금만 더 포즈 유지해 주세요! 표정 좋아. 몇 컷만 더 찍고 마무리 하자고”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2층 높이에 설치된 카메라가 흔들리더니 그대로 떨어졌다.
“꺄악!”
철컥—!
카메라가 보영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어떡해….보영 씨!” 놀란 스태프들이 달려왔고,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쓰러졌다.
“빨리 119에 전화해!”
곧바로 구급차가 도착해 보영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며칠 동안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보영은 휴대폰을 꼭 쥐고 있었다.
“선우 제발 받아줘”
여러 번 전화했지만, 선우의 휴대폰은 계속 진동만 울릴 뿐, 대답은 없었다. 그는 광고 카피 마감에 매달려 있었
다.
보영은 눈을 감았다.
“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서운함은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이틀 뒤, 선우는 보영이 좋아하는 연어초밥을 사들고 병원을 찾아왔다. 그러나 보영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눈빛은 차갑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괜찮아?” 선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괜찮냐고…? 어떻게 그렇게 전화를 안 받아.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던 거야?”
선우가 당황하며 변명했다.
“미안, 걱정했지… 하지만 밀린 일이 너무 많아서…일 마무리하면 전화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었네“
보영은 목소리를 높였다.
“밀린 일? 네 일은 그렇게 중요하면서, 나는 중요하지 않아? 난 바쁜 스케줄 시간 쪼개가며 너 만나러 가기도 했었는데….넌 내가 병원에 누워 있는데도 글자 몇 줄에 매달려 있었다는 거야?”
선우는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그런 건 아니고… 미안해…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보영은 손에 쥔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 이제 믿을 수가 없어. 사랑한다면서… 가장 힘든 순간에 곁에 없었잖아. 스텝들이 그러더라 남친 맞냐고, 어쩜 그리 무심하냐고….”
선우는 미안해라는 말뿐. 할 말이 없었다.
한편, 진석의 집.
거실에는 진석의 어머니 목소리가 가득했다.
“진석아, 이제 나이도 있는데 결혼해야지. 만나는 사람 있다면서…… 너 언제까지 혼자 살 거니“
“만나는 사람은 있는데. 아직은…. 더 만나보고요.”
“뭘 그리 고민해. 아니다 싶으면 다른 여자 소개해주고… 지인의 지인의 딸이 최근에 유학마치고 돌아왔다고 하던데“
”아… 좀…제발요….”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니… 마흔 전에는 해야지”
”제 사람은 제가 골라요“
어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결혼 얘기를 물어보셔서 진석도 지쳐가고 있었다.
진석의 방, 늦은 밤.
거실에 홀로 앉은 그는 반지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마음은 아직 확신이 없는데…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어. 어머니도, 친척들도, 친구들도… 다들 내가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지.”
그는 손끝으로 반지를 굴리며 눈을 감았다.
“고은이 정말 내 사람일까? 아니면… 단지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뿐일까.”
머릿속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마흔 전에는 해야지. 네가 언제까지 혼자 살 거니.”
진석은 두 손을 꼭 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혼자 남으면 실패한 인생이라 할 거야.… 결혼. 하긴 해야해. 그래야 체면을 지킬 수 있어.”
그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동시에 결심으로 굳어졌다.
“고은이 내 마음을 다 채우지 못해도… 어머니 뜻을 따르는 게 맞아. 나는 장남이고, 집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고은의 집.
토요일 저녁, 진석은 장미 100송이 꽃다발과 반지를 준비해 고은을 찾아왔다.
“고은.”
작은 상자를 꺼내며 그는 천천히 말했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고민했어. 당신을 사랑하고, 나랑 평생을 같이 합시다.”
고은은 순간 숨이 막혔다.
눈앞의 반지가 반짝이며 빛을 뿜어내는데, 그 빛은 단순한 반짝임이 아니었다.
그때, 거실의 시계 초침이 멈추며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흔들렸다.
고은의 그림자는 세 갈래로 갈라졌다.
첫 번째 그림자는 진석을 향해 똑바로 손을 뻗었고, 두 번째 그림자는 카페에서 웃던 선우의 얼굴을 떠올리듯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 번째 그림자는 공허 속으로 사라지며, 마치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흔들렸다.
고은은 숨이 막히며 벽을 바라봤다.
“내 그림자가… 갈라지고 있어.”
그림자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녀의 마음을 시험했다.
진석을 향한 그림자는 가문의 체면과 안정, 선우를 향한 그림자는 설렘과 진심, 사라져가는 그림자는 불안과 공허를 상징했다.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공기 속에 스며들었다.
“인연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흔들린다. 어느 길을 따를지는 네 뜻에 달려 있다.”
고은은 떨리는 손끝을 꼭 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운명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야 하는 거야.”
그러나 진석은 고은의 그림자 분열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반지와 꽃다발,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마흔 전에는 해야지. 네가 언제까지 혼자 살 거니.”
“가문의 장손으로서 체면을 지켜야 한다.”
진석은 고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혼자 남으면 실패한 인생이라 할 거야. 결국 결혼해야 해. 어머니 뜻을 따르는 게 옳아.”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는 듯 들렸지만, 그 속에는 주변의 시선에 휘둘린 결심이 숨어 있었다.
“고은, 대답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