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은 이렇게 작게 온다.

시간이 이어지는 순간

by HB

아들이 아들을 낳았다. 예정 보다 거의 한 달쯤 남은 일요일 새벽이었다. 항상 일찍 일어나는 남편이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나를 부른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밤새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심장이 먼저 내려앉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말을 해요! 무슨 일인데?”

“며느리가 오늘 새벽에 출산을 했대”

“아직 멀었다고 했는데, 별일은 없는 거지?”


둘이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서야 우리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아들의 연락을 기다렸다. 아들도 새 생명을 갑자기 만난 탓인지 경황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아 말없이 시계만 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을 깨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아들의 전화였다. 아이를 보러 와도 된다는 말, 산모와 아기가 모두 안정됐다는 말. 그제야 긴 호흡을 할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며느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정보다 이른 시간, 겁도 났을 텐데 잘 견뎌줘서, 무사히 아이를 데려와줘서, 그저 고마웠다. 기특하다는 말보다 고맙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전화를 끊고 보니 남편은 어느새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처음 만나는 아이 앞에서 조금 더 괜찮은 어른으로 서고 싶은 얼굴이었다. 손자라는 존재가 이 남자에게는 이런 의미를 라는 걸, 누군가의 삶 앞에서 자연스레 등을 곧게 세우게 만드는 마음이라는 것을 그 순간 알 것 같았다.


집 가까이에 있는 병원으로 향하는 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닫힘 버튼을 누르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설렘보다는 조심스러움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너무 소중해서 기쁘다기보다 조심스러운 마음이 먼저 드러난 얼굴이었다.




신생아실 면회 시간이 되자 미리 예약한 부모와 조부모들이 모여들었다. 정확한 시간이 되자 커튼이 열렸고 모두 작은 탄성을 질렀다. 누군가의 처음을 함께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네 명의 신생아가 창가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다 비슷해 보여 잠시 당황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각자의 시간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이나 일찍 나온 아이 답지 않게 손자는 또렷했다. 작은 몸으로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마음에 내려앉았다. 기쁘고 오래 바라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잘 왔다’는 말이 마음속에서 먼저 나왔다.


아들에게 며느리의 안부를 묻고 잘하라는 말을 남겼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단해서 조금 더 안심이 되었다. 아들도 괜찮은 아버지가 되려고 이미 애쓰고 있다는 게 그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와인을 한잔 하며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지만 대화는 자꾸 중간에서 멈췄다. 오늘 저녁은 쉽게 잠들지 못할 거라는 말만 남았다.


불을 끄고 누웠을 때 오래전 하루가 문득 겹쳐 떠올랐다. 서른여섯 해 전, 내가 아들을 낳았던 날이었다. 그날의 몸과 마음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날에서 오늘까지 나는 많은 시간을 건너왔다. 그리고 오늘 그 시간이 다시 한 생의 탄생 앞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쁨은 요란하게 오지 않았다. 환호로 남지도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수많은 생각 사이를 서성였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어떤 기쁨은 이렇게 작게 와서 사람을 더 깊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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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