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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수 Apr 03. 2023

죽림칠현(竹林七賢)과 히피(Hippie) 2

록커의 술과 사람, 음악 이야기 ④

역사 기록에 나타난 술 이야기 ③


 고등학교 1학년 때 일렉트릭 기타를 사고 록밴드를 시작했다. 피를 끓게 하는 록 특유의 마초적인 사운드를 내 손으로 구현해 내고 싶기도 했지만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록스타들의 원초적인 매력을 닮고 싶은 욕구도 컸다. 물론 그런 매력 발산은 테리우스 신성우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아 갈 때쯤 1969년 미국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 영상을 접했다. 당시만 해도 8, 90년대 헤비메틀을 즐겨 듣고 연주하다 보니 60년대 록은 여러 측면에서 시시하다고 느꼈는데, 이 영상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미국 국가 “The Star Spangled Banner”를 연주하는 장면은 그런 나의 고정관념을 뿌리째 뒤흔드는 충격을 선사했다. 처음에는 특별한 기교 없이 장엄하게 미국 국가의 멜로디를 연주하다가 중후반부터 폭탄이 터지고, 비행기가 추락하고, 모든 것이 파괴되는 사운드를 구사하며 전쟁으로 인한 파괴적 공황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해내는데, 이러한 연주력은 지미 헨드릭스를 왜 역사상 최고의 록 기타리스트라고 하는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애국의 상징인 국가를 록으로 변주하여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자국 정부의 치부를 드러낸 것은 록이 갖고 있는 저항 문화로서의 속성 또한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연주하는 지미 헨드릭스

 

 사실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이런 역사적인 연주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영상 속에 등장하는 수십 만의 무리, ‘히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죽림칠현이 술과 마약을 즐기고 유교적 예의 틀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던 것처럼 히피 역시 술과 마약을 즐기고 기존 가치관을 해체하며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고자 했다. 다만 권력의 격변기에 생존을 위한 방책으로 대나무 숲에 들어가 권력과 거리를 두었던 죽림칠현과는 달리 히피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강국으로 떠올라 사회·경제적으로 아주 풍요로웠던 미국의 기성사회에 맞섰다. 조잡하고 조직적이지 못했을지언정 기존 권력 앞에서 비굴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특히 베트남 전쟁은 반체제를 앞세우는 히피들에게 더욱 뚜렷한 목적의식을 심어 주었다. 이들이 ‘사랑과 평화’를 유난히 강조했던 것은 베트남 전쟁의 영향이 컸다. 히피 문화를 ‘꽃의 혁명’이라고 하고 히피들을 ‘꽃의 아이들’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꽃은 평화를 의미한다. 사랑과 평화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다.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가치관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이들이 택한 방법은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의 기준에서도 파격적이었다. 집단 섹스를 비롯하여 자유로운 섹스를 추구했고, 마리화나나 LSD 같은 마약을 복용하고 환각에 빠져 살았다.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와는 달리 무지개빛이 펼쳐지는 환각의 상태야말로 사랑이 정신을 지배하는 경지라고 여겼다. 섹스, 마약과 함께 히피 문화를 구성하는 중심 요소가 바로 록 음악이었다. 고루한 기성 음악의 틀을 쉴 새 없이 깨뜨리는 사운드와 리듬에 히피들은 환호하였고,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산타나 등이 무대에 섰던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는 40만 명이 넘는 히피들이 모여 날 것 그대로의 히피 문화를 보여주었다. 30년 후에 열린 199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온갖 무질서와 방화, 성폭행의 장으로 전락했던 것에 비하면 1969년의 우드스톡은 역사적이면서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체제에 맞서 적극적으로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히피들을 미국 정부는 강력한 물리력을 동원하여 제압하기 시작했으며, 예수의 환생이라 자처하는 찰스 맨슨이라는 자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LSD를 복용하고 당시 인기 절정의 여배우 샤론 테이트를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랑과 평화의 상징으로서의 히피는 사실상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 공연장의 인파


  이 연재 글의 꼭지명이 ‘록커의 술과 사람, 음악 이야기’이다. 스스로를 ‘록커’라 지칭하는 게 업으로 록 음악을 하는 이들에게는 실례 같기도 하고 한편 부끄러운 마음도 있어서 다른 말을 써볼까도 했지만 결국 ‘록커’를 고수한 건 음악적 실력과 경력을 떠나 40년 넘는 시간을 록커처럼 살아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란 생각에서다. 마약은 할 기회가 더러 있었지만 전혀 입에 대지 않은 대신 술 담배는 필수 영양소 섭취하듯이 즐겼고, 특유의 반골 기질 덕분에 권력과 불화하고 세속적 성공과도 영 가깝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1800년 전의 죽림칠현이나 50년 전의 히피들과도 비슷한 구석이 꽤 있는 것이다. 다만 무절제함과 중독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내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죽림칠현이든, 히피든 큰 속박의 굴레를 스스로 졌던 존재들이 아닌가 싶다. 나는 죽림칠현도, 히피도 아닌 만사 자유로운 록커로 살다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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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작은책> 2023년 4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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