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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수 Mar 03. 2023

죽림칠현(竹林七賢)과 히피(Hippie) 1

록커의 술과 사람, 음악 이야기 ③

역사 기록에 나타난 술 이야기 ②     


  3세기 중국 위진 시대 때 속세를 뒤로 하고 대나무 숲에 모여 거문고 뜯고 술 마시며 고상한 구라를 풀던 일곱 명의 선비를 일러 ‘죽림칠현’이라 한다.(주석: 죽림칠현이 속세를 뒤로 한 것이 아니라 “녹림의 고적함이 있으면서도 황국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은둔자라는 밑천으로 명성과 권력을 얻었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죽림칠현에 속하는 산도와 왕융은 최고 지위인 삼공의 자리에 올랐고, 상수는 사마소 정권에서 벼슬을 했다.)  지난 글에서 인용한 태조 4년(1395년) 4월 25일자 실록의 상소 내용 중 “사대부들이 모두 옛날 진(晉)나라 사람의 풍류를 따라, 쑥대머리로 술을 마시는 것을 스스로 마음이 넓고 달통한 사람이라 하고, 예법을 폐기하고 세상만사를 잊어버리니…”라는 구절은 바로 죽림칠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천 년이 지난 고려 무신정권기 권력에서 소외된 문인들이 ‘죽림고회(竹林高會)’라는 모임을 만들 정도였으니 죽림칠현의 아우라는 시공을 가르고도 남았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문인이자 죽림고회에 출입하기도 했던 이규보는 「칠현설(七賢說)」에서 “이들은 서로 만나 술 마시고 시 지으며 호탕하게 즐겨서 세인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몽골에서 증류법이 전래되어 술의 도수도 높아졌고, ‘큰 산과 강을 경계로 하였다’는 대토지를 경영한 권문세족이 무신 세력에 이어 권력을 쥐었으니 권력 밖에 있던 사대부들의 죽림칠현 모방 풍조는 한껏 업그레이드되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고군분투하여 성리학의 나라를 세운 조선 초기 관료들 입장에서는 ‘진(晉)나라 사람의 풍류’를 따라 술에 취한 채 저세상 소리나 읊어대는 이들이야말로 이제 막 닻을 올린 사회의 발전을 좀먹는 것을 넘어서 한 왕조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암적 존재로 보였을 터, 사헌부에서 이를 거론하며 금주령을 내리자는 상소를 올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죽림칠현을 좀 더 들여다보자.


<죽림칠현도>


  죽림칠현에는 완적과 그의 조카 완함이 포함되어 있다. 명문 집안의 인재였던 완적은 사람에게 매이는 것을 싫어하였지만 능력이 출중하다는 세간의 평가에 따라 권력 핵심부로부터 부름을 받아 벼슬을 지냈다. 그런데 사마 씨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보병 병영에 좋은 술이 저장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보병교위 자리를 자청했다. 스스로 지위를 강등해 가면서까지 술에 탐닉하는 삶을 택한 것이다. 그러한 삶에는 유교적 질서와 형식인 예(禮)가 자리 잡을 틈이라고는 없었다. 오히려 이를 배격하고 속세의 관습을 초월하고자 했다. 일례로 보병교위 시절 바둑을 두고 있을 때 모친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으나 바둑을 계속 둔 후 술을 두 말 마시고는 그제서야 대성통곡을 하며 여러 되의 피를 토했으며, 매장을 할 때도 돼지고기를 안주로 다시 두 말의 술을 마시고 통곡을 하며 피를 토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예법에 얽매인 지식인들을 보면 흰자위를 드러낸 눈으로 흘겨보고, 거문고를 타며 술을 마시고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호의 어린 눈길로 대하였단다. 백안시(白眼視)라는 말과 청안시(靑眼視)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그의 조카 완함은 친척이 모이면 커다란 동이에 술을 넣고 둘러앉아 실컷 마셨는데, 그때 한 무리 돼지 떼가 달려들어 술을 먹으러 오니 함께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으로서도 범접하기 힘든 수준의 기행이다.

완함

  이러한 기행의 기저에는 조 씨의 위나라가 사마 씨의 진나라로 교체되는 격변기를 살았던 이들의 불안이 깔려있다. 사마소가 자신의 아들 사마염을 완적의 딸과 혼인시키려고 하자 완적이 60일 동안 술만 퍼먹음으로써 혼사를 없던 일로 만들었다는 일화는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세상이 어찌 변할지 모르는 판국에 딸을 권력의 심부로 보내 화를 자초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술에 대한 집착과 예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욕구에는 분명 병적인 구석이 있었다. 이들은 술도 모자라 한식산 또는 오석산이라고 하는 중독성 약재, 즉 마약을 탐닉하기도 했다. 이 약을 먹으면 몸에 열이 나고 심한 갈증이 일어 차가운 것을 마셔야 하기 때문에 술과 함께 복용하도록(?!) 처방되었다고 한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유령은 술만 마시면 알몸으로 돌아다니면서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천지를 거처로 삼고 집을 속옷으로 삼고 있는데 당신들은 어찌 나의 속옷까지 들어왔소?”라고 했다는데, 이는 예법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죽림칠현의 자유인적 풍모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한식산 중독으로 발생한 몸의 열과 부종 때문에 옷을 벗거나 입더라도 헐렁한 옷을 입어야 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석산


  국내 역사 기록들을 중심으로 글을 구성해 보려던 애초 의도와는 다르게 처음 인용한 조선왕조실록 기사의 “옛날 진(晉)나라 사람의 풍류”라는 구절에 눈길이 꽂혀 언제 보았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죽림칠현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며 글을 쓰고 있으려니 1960년대의 히피(Hippie)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었다. 170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과 12,000km라는 공간의 거리가 무색해 질만큼 공통분모가 많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한 썰은 다음 글에서 제대로 풀어볼 작정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글의 소재 덕에 어설프게나마 세워 두었던 계획이 벌써 흐트러지고 있는 셈인데 살아가는 게 그렇듯 모든 게 계획대로만 되는 건 아니고, 예법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죽림칠현 못지않게 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의식의 흐름을 최대한 반영하여 자유롭게 글을 써 보고자 한다. 연재한 지 불과 3회차 만에 시대로는 서기 3세기부터 현대, 공간으로는 한국에서 중국, 중국에서 미국으로 종횡무진하고 있으니 글로벌 시대에 참으로 걸맞는 글쓰기라 아니할 수 없지 않은가. 엊그제 먹은 해창 막걸리가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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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작은책> 2023년 3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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