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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수 Feb 01. 2023

술이 좋아 술에 죽고, 술이 문제라 술을 금하고

록커의 술과 사람, 음악 이야기 ②

역사 기록에 나타난 술 이야기      

 

  태조 4년(1395년) 4월 25일 헌사(憲司, 사헌부)에서 태조에게 금주령을 내리자는 상소를 올려 윤허를 받았다. 상소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사람의 성품을 기르고 재화의 근원을 막는 뜻을 깊고 절실히 하는 것이 술을 금하는 최상의 방책입니다. … 홍수, 가뭄 등의 재난을 만나면 술 마시는 것을 금하여 곡식을 저축하려 하니, 이것은 술을 금하는 중등의 방법이며, 혹은 재정이 부족할까 하여 개인의 양조를 금하고 관원을 두어 독점 판매하여 그 이익을 취하니, 이것은 술을 금하는 최하의 방법입니다. … 고려조 말기에 기강이 무너지고 예의와 제도가 허물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옛날 진(晉)나라 사람의 풍류를 따라, 쑥대머리로 술을 마시는 것을 스스로 마음이 넓고 달통한 사람이라 하고, 예법을 폐기하고 세상만사를 잊어버리니, 서민들이 또한 이를 본받아 …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김후신, "통음대쾌(痛飮大快: 흠뻑 마셔 크게 유쾌하다)"


  인용문에는 생략했지만 상소에는 《서경》 〈주서〉 ‘주고’편의 술은 오직 제사 때만 마시고 덕으로써 취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과 《예기》의 한잔 술을 마심에도 서로 백 번의 절을 하며 마심으로써 취하여 실수하거나 몸가짐이 흐트러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백성의 덕을 잃게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술이니 지극히 조심하라는 이야기인데, 왕조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대부, 서민 할 것 없이 술을 진탕 마시고 있으니 아예 술을 못 마시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금주령이 내려지더라도 예외는 늘 있기 마련이었다. 대표적인 예외 조항이 바로 임금이 베푸는 연회였다. 태조 4년(1395년) 10월 11일 실록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남양백(南陽伯) 홍영통이 말 위에서 떨어져 돌아갔다. … 국초에 이르러 기구(耆舊, 매우 늙은 사람)라 하여 남양백에 봉해지고 여러 번 두터운 접대를 받았다. 임금의 탄일 잔치에 나가서 만취되어 돌아오다가 말이 놀라는 바람에 떨어져 죽었다….”      


  위에서 언급한 금주령이 내려진 지 6개월이 채 안 되었을 때인데, 개국공신 작위를 받은 재상이 태조의 생일잔치에서 만취에 이르도록 술을 먹고 집에 가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때까지 금주령이 지속되었는지는 기록상 알 수는 없으나 금주령을 내린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아 나라의 노(老) 재상이 술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으니 태조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또한 난감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3일 뒤 기사를 보면 태조가 개국공신인 조준, 김사형, 권중화, 정도전 등에게 대나무로 만든 요여, 즉 시체를 묻은 뒤에 혼백과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작은 가마를 내려 주었다고 한다. 홍영통이 술 때문에 죽은 것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요여(腰輿)


  《조선왕조실록》에는 술과 관련한 기사들이 차고 넘친다. 500여 년간의 장대한 기록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주연(酒宴)을 베풀었다는 기사가 금주령을 내렸다는 기사보다 훨씬 많은 걸 보면 술을 숭상한다는 ‘숭음’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닌 듯하다. 임금과 신하 간에 술을 마시는 것은 군신의 의리를 밝히기 위해서라는데, 실록에는 술 먹고 취해 임금 앞에서 기생을 희롱하는가 하면 임금을 ‘너’라고 부른 사실도 기록되어 있어 연회가 군신의 의리를 밝히기는커녕 실성한 수컷들이 너절한 욕구를 드러내는 장으로 전락하기도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근대 사회 절대 권력자인 왕의 편을 들 생각은 없지만, 언관들이 선을 완전히 넘은 재상들의 강한 처벌을 주장함에도 임금의 너른 아량을 보여주기 위해, 또는 자신의 세력을 잃지 않기 위해 이들을 감쌌던 왕들을 생각하면 왕 노릇도 여러모로 못해먹을 짓이 아니었나 싶다.     


 

  인공위성을 우주 궤도에 안착시키는 마당에 《조선왕조실록》 같은 옛 기록을 들먹이는 것이 고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백 년의 시간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술과 관련하여 사회적 이슈가 나타나는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서두의 실록 기록에 나와 있는 금주령의 목적을 보면 그 최고의 명분은 사람의 성품을 기르고 재화의 근원을 막는 뜻을 깊고 절실히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자연 재해가 발생했을 때 곡식을 비축하기 위한 것(중등의 방법)이며, 왕실 재정 확보를 위해 개인의 양조를 금하고 관에서 독점 판매하기 위한 것(최하의 방법)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나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의 밀주 금지령 또는 미곡 사용 금지 초치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다. 역사 기록 속 개개인들이 술 때문에 벌인 추태와 그로 인해 벌어진 사건들은 현재 (나를 포함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앞으로도 사람과 음악, 역사와 일상을 넘나들며 술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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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작은책> 2023년 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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