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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수 Dec 01. 2023

정리

로커의 술과 사람, 음악 이야기 ⑫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일자에 원고를 보내는 작업을 한 매체는 《작은책》이 처음이다. 인터넷 매체인 《딴지일보》의 게시판에 마음 내키는 대로 올리던 글이 몇 차례 메인 기사로 채택이 되어 필진이 된 이후 잊을 만하면 원고 청탁이 들어와 글을 썼고, 전 일터였던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의 격월간지 《비정규노동》에 가끔씩 기고했던 걸 제외하면 나의 글은 대부분 SNS에 일기처럼, 푸념처럼 경험과 생각을 늘어놓는 데에 그쳤다. 상황이 그러하니 《작은책》에 글을 연재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부담이 많았다. 일상 속 글을 쓰면 된다고 들었지만 나의 일상이라는 게 지면을 장식할 만한 것이 못 되어 몇 년 전부터 생각만 하고 있던 소재인 술과 역사 속의 사람, 음악을 엮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공력을 많이 들였던 몇몇 글이 어렵기도 하고 꼭지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어서 일상을 소재로 기고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에게 큰 병이 찾아들었다. 20년 넘게 폭음에 가까운 음주를 이어간 나와는 달리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술을 받는 체질이 아니라 술도 멀리 했고, 담배도 끊은 지 몇 년이 흐른 상태였다. 더군다나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이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나 찾아들었으니 정말 황당한 노릇이었다. 상황은 참 고약하지만 이 쓰디쓴 일상이 원고의 소재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일상이 글에 스며들었다. 다만 그 일상이 수개월 전에도, 지금도, 끝이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앞으로도 이어지고 내 삶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고 있을 것이라서 일상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와 내 가족의 사적인 이야기로 글을 채워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특정 매체에 연재하는 형식보다 마음이 내킬 때 개인 공간에 쓰는 방식으로 해 보려고 한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작은책》 연재를 정리하고 말이다.


  내년 2월이면 20년 넘는 서울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고향인 제주로 내려간다. 갈수록 뜸해지고 있지만 매 년 한 번은 모여 술잔 나누던 대학 동기들과의 모임도 정리하고, 일터 동료로 만나 어느새 10년 지기가 되어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던 벗들과의 만남도 정리하고, 좌충우돌하긴 했지만 때 되면 합류해 어쭙잖게 힘을 보태곤 했던 한국비정규노동센터와 산하 위탁운영기관 생활도 정리해야 한다. 결혼 후 정착해 10년을 넘게 살았던 수유리 생활도 정리하고, 강북구 뮤지션들의 모임인 ‘강북음악크루’ 운영진 활동도 정리하고, 40대 이후에도 하드록과 헤비메탈을 멋지게 연주해 낼 수 있음을 함께 증명해 냈던 밴드 ‘개차불스’ 생활도 정리해야 한다.

 

  ‘술로 흥하고 술로 망할 놈’이라던 친한 벗의 말마따나 시도 때도 없이 술자리를 만들며 대학 동기들과 인연을 다져 놓았고, 일터의 동료들과도 미운 정 고운 정 다 쌓았다. 강북구 뮤지션들과의 인연도 술자리에서 시작되었고, 주변 뮤지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술자리를 이어가던 중에 밴드 ‘개차불스’도 자리를 잡았다. 술로 흥한 셈이다. 그런가 하면 술 때문에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고, 스스로 이미지를 깎아 먹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30대 중반 이후 빠르게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높은 간수치, 만성 위염과 식도염, 임파선부종, 통풍 등 술로 인한 증상과 질병이 잇따른 것이다. 술로 망할 수밖에 없는 이 명백한 현실 앞에서 기타와 더불어 ‘말없는 최고의 벗’이라 여겨 온 술마저도 정리해야 하는지를 두고 아직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있다. 


  정리해야 할 것들은 더 있다. 살던 집도 정리해야 하고, 적지 않은 분량의 책들과 살림살이들도 정리해야 하며, 몇 년 약정으로 가입한 인터넷이니 정수기니 하는 것들도 정리해야 하고, 주위에 나누어 줄 것들도 별도로 정리해야 한다. 여기에 쓰지 못 한 것들도 많을 테니 제주에 내려가기까지 남은 100여 일의 시간은 대부분 정리를 위해 보내게 될 것이다. 그 일환으로 내가 기타를 치고 있는 밴드 ‘개차불스’는 12월 16일 토요일 오후 6시에 수유리에 있는 ‘싸롱드비’에서 공연을 한다. 서울시민으로서 하는 나의 마지막 공연이다. 


  아쉬움이 많지만 또 마냥 아쉬워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거동이 불가능한 아버지와 그로 인해 발이 묶여버린 어머니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귀향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우리 부부가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제주에 대한 향수를 해소하고, 아이들에게는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뛰놀 수 있도록 하는 건 제법 괜찮은 선택이다. 새로운 선택에는 기존의 것들에 대한 정리가 당연히 따르는 법 아닌가. 20여 년 서울에서 생활하는 동안 심신에 덮여 있던 묵은 때는 벗겨내고 어지럽게 얽혀 있던 관계들도 말끔하게 정리할 것이며, 육지에 있는 친한 벗들과는 드문 만남 속에서도 소중한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걸 서로 확인하는 계기로 삼을 요량이다. 정리가 더 큰 풍족함을 낳는 역설을 만끽하며 제주 생활을 이어갈 것이다.      


  지금까지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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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작은책> 2023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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