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 2017 한국사 교과서 편찬과 관련한 이야기 ④
예상했던,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나 결국 정부와 여당은 중학교 역사Ⅰ,Ⅱ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기로 사실상 확정했단다.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완연한 ‘전직’ 역사 교과서 편집자이긴 하지만 현재 중고등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2009년 개정 교육과정’ 교과서까지 만들고 나왔으니 아직 ‘감’은 남아 있는 셈인데, 다른 논란은 다 제쳐두고 국정 교과서 개발 실무만 놓고 봐도 단연코 저건 미친 짓이다.
2년 전에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와 관련하여 딴지에 글을 쓴 적이 있는데(관련기사 :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는 예정된 일이었다) 1부에서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교과서가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요약하자면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경우 2009년 말에 개정 교육과정이 공포되었고, 2011년 말에 집필기준이 마련되었다. 교과서 편집자들은 2013년 초까지 심사본을 개발하여 검정 담당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 제출해야 했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개발하는 출판사의 경우 중학교 역사 교과서도 함께 개발하는 게 대부분이라는 걸 감안하면 위의 개발 기간과 상당 부분 겹쳐 편집자가 교과서 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기간은 짧게는 5개월에서 길게는 8개월밖에 확보되지 않는다.
그렇게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해대며 만들어 낸 심사본이 검정을 통과하면 국편은 검정 과정에서 지적된 내용상의 오류나 검토해야 할 부분, 표기나 표현이 잘못된 부분을 정리한 '수정 보완 권고서'라는 문서를 보내는데 말이 ‘권고’지 수정하지 않으면 본심사에서 최종 탈락시킬 수 있다는 엄포를 늘어놓는다. 이때 수정 보완 권고서의 양은 상당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짧은 기간 동안 교과서 기획과 실무, 검토까지 다 해야 하니 이게 어디 그 적은 인력으로 다 감당이 되겠는가 말이다. 심사본 제출이 임박하면 편집자들의 체력은 이미 바닥나 있어서 스무 번 이상 교정을 거친 게 무색하게 단순한 오류들도 잡아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내 경우 마지막 PDF를 검수하는 과정에서 꽤 큰 이미지가 엑박으로 들어가 있는 것마저 놓치기도 했다. 엑박이 들어간 심사본을 제출했단 얘기다. 검정에 통과한 게 천만다행이었지만.
졸라 후다닥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거다
위의 내용을 잘 톺아보자. 이제 국정화가 최종 확정된다면 2017년부터 일선에서 국정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치게 된다. 아직 국정화에 따른 교육과정 총론과 각론이 확정되지 않았다. 얼른 확정 지어야겠지. 교육과정이 확정되면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집필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 또한 얼렁뚱땅 확정지어야겠지. 검정과 수정보완 기간을 확보하기 위해 보통 1년 전에는 교과서 개발을 마쳐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내년 3월까진 심사본이 나와야 한다(국정 교과서는 현재 검인정 역사 교과서 검정 담당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개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교과서 개발을 포함하여 저 모든 과정이 불과 5개월 만에 완료되어야 한다는 거다. 응? 교과서가 무슨 계간지라도 되나? 다루어야 할 내용과 쟁점이 방대하여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기획과 서술 방향을 논의하는 데만 해도 많은 시간과 체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게 이 작업인데 5개월? 그나마 이 5개월은 정부의 교육과정 확정과 집필기준 마련 기간을 포함한 것이므로 교과서 개발 실무 기간은 그보다도 짧아진다. 계간지가 아니라 월간지 수준으로 전락할 위험성은 다분한 거다. 지난 글에서도 자조적으로 읊긴 했지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던 윤동주의 시구처럼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데 교과서가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짓을 정부와 여당이 주도하고 있다. 확신하건대 국정화가 확정되고 그에 따라 국정 교과서가 개발되면 교학사 교과서 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논란이 일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좌편향 교과서? 아니, 정권 친화적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사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명희 교수와 권희영 교수가 공동 대표 저자로 참여하여 만들어진 것이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다. 이들이 뉴라이트 계열인 한국현대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단 사실은 전 글에서도 밝힌 바 있고 뉴라이트 인사들이 역사, 특히 근현대사 기술에 어떤 입장을 보이는지 역시 밝힌 바 있으므로 여기선 중언부언하지 않고 넘어가겠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쓴 교학사 교과서도 당시 국편의 검정에 통과했고, 나머지 출판사의 저자들이 쓴 교과서들 역시 국편 검정에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심사본이 교육부의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에 어긋남 없이 기술했다고 인정받았다는 거다. 그럼에도 이를 두고 여당 대표란 자는 “좌파적 세계관에 입각해 학생들에게 민중혁명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여진”단다. 그렇다면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좌경화된 세력들이 마련했고, 그에 따라 좌파 학자와 교사들이 교과서를 저술했으며, 좌파들이 잠입해 있는 국편에서 이를 다 통과시킨 셈인데, 이건 가히 빠콩 총장에 버금가는 정신세계다.
교과서 개발 실무로 들어가면 편집자와 저자들은 집필기준을 그야말로 닳아 없어지도록 본다. 집필기준에 사용된 용어, 내용 모두 빠뜨림 없이 교과서에 녹여 내기 위해 주말, 공휴일 다 바쳐 가며 장시간 회의를 한다. 예를 들어보자. 고등학교 한국사 집필기준의 일부분이다.
2009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출처 - <교육과학기술부>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자유 민주주의’라는 용어 사용으로 큰 논란이 벌어졌던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선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집필기준 자체만 놓고 보자. ③ 이하 첫 문장 내용은 중단원 제목으로 반드시 다뤄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중단원 제목이 ‘자유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민 기본권의 성장’이다. 두 번째 문장의 내용들은 중단원 아래 소단원 제목으로 배치된다. 그렇게 하여 ‘자유의 종이 울리다, 5·16 군사 정변과 유신 체제,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다, 6월 민주 항쟁과 민주화의 진전’이라 이름 붙인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지만 이 또한 치열한 논의 과정에서 결정된 것들이다. 이를 토대로 각 내용들을 집필해 나가게 된다. 그 내용들 역시 집필기준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검토해야 한다. 철저하게 정부의 방침을 따르는 셈이다.
‘자유 민주주의’ 용어와 관련해서는 집필 회의 과정에서 논란이 많은 이 용어를 사용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관해 우리끼리도 이견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용어가 교육과정 개정안 공청회 개최 이후 고시된 개정안에 난데없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정안이 교과부 산하 상설기구인 ‘교육과정심의회’의 심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교육과정 개발 정책 실무를 수행하였던 정책위(역사 교육과정 개발 정책 연구위원회) 위원들과 이에 대한 검토 자문 역할을 하던 일부 추진위(역사 교육과정 개발 추진위원회) 위원들도 모르는 사이에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가 '자유민주주의'와 동의어임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 한국현대사학회의 주장을 교육부 자체적으로 끼워 넣은 거다. 그러나 따르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제아무리 졸속으로 처리된 교육과정이라 한들 따르지 않고선 수억 투자한 교과서 개발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기에.
일부만 예로 들어 보았다.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가 포함되었던 부분도 이러할진대 다른 부분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 잘 들어가며 만들어 낸 게 현행 검인정 역사 교과서다. 게다가 타 출판사와 경쟁을 해야 하니 기획과 디자인에 열성을 다하고, 좋은 자료 확보에 없는 시간 쪼개가며 씨름하여 만들어 낸다. 국정으로 돌아간다면 이보다 더 나아질 게 있을까? 이 또한 확신하지만 단연코 나아질 거 없다. 국정 국사 교과서 세대라면 잘 알 것이다. 외관부터 얼마나 구렸는지.
군 제대 후 학원에서 고등학교 근현대사를 잠깐 가르쳤던 적이 있는데 내용은 둘째 치고 외관부터 획기적으로 변해 있더라. 올컬러는 기본이고 산뜻한 디자인과 다양한 참고자료까지. 검인정 제도가 아니고서는 결코 나오지 못할 퀄리티다. 새로 국정 교과서를 개발한다면 아마도 그동안 검인정 교과서들이 쌓아 온 형식과 내용들을 그대로 베껴와 고중세사를 떡칠해 놓고 근현대사 부분만 수구 세력들의 입맛에 맞게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을 동원하여 바꿔놓을 거다. 그나마도 개발 기간이 턱없이 짧으니 엉망진창이 될 공산이 크다. 뭘 어쩌자는 건지.
"우리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 뜻 있는 이들이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
우리 박통께서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5년, 뉴라이트 인사들로 채워진 ‘교과서포럼’에서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 기념회에서 한 말이다. 박통은 한결같다. MB는 제 이익이나 챙겨 먹을 캐릭터라지만 박통은 그 한결같음으로 시침을 거꾸로 돌려놓으려는 캐릭터다. 그리고 포문을 열었다. 이미 곳곳에는 촌스러워 눈길도 잘 가지 않는 새마을 기가 다시 나부끼고 있다. 소위 ‘3대 역사기관’이라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의 기관장들은 뉴라이트 계열이거나 정권 친화적인 이들로 다 채워져 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질 좋은 교과서 개발이라는 본질적인 고민은, 최소한 이 정권에는 없다. 다만 국민을 동원 대상으로, 호구로나 여기는 저 천박한 권력욕만 있을 뿐. 국정화 시도? 이상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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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딴지일보> 2015년 10월 8일자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