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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예술과 비극적인 삶을 통해 인간 존재의 감정 탐구

by Selly 정

모딜리아니, 예술과 비극의 아이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마치 오래된 와인병의 코르크를 따는 것처럼 짙은 향기가 공기 중에 퍼져나가는 듯했어요. 정우철 작가의 내가 사랑한 화가들을 펼쳐 들었던 어느 가을 오후, 창밖으로 파리의 회색빛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죠.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어요.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마치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 같았답니다.

그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어요. 마치 겨울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 때처럼요. 모딜리아니의 비극적인 사랑과 파란만장한 생애는 단순히 지나간 예술가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깊은 골짜기와 높은 산등성이를 오가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지도 같았답니다.

책을 덮은 후에도 그의 존재는 내 안에 오래도록 메아리쳤어요. 밤새 빗소리처럼 마음속을 두드리며, 아침이 와도 사라지지 않는 잔향처럼 남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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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뜨에서의 예술적 영감

이탈리아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문화의 젖을 먹고 자랐어요. 하지만 그의 몸은 마치 금이 간 도자기처럼 연약했답니다. 흉막염, 폐결핵, 장티푸스—병명들이 그의 어린 시절을 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죠.

파리에 도착한 그는 몽마르뜨의 언덕을 오르며 숨을 헐떡였을 거예요. 가파른 돌계단을 밟을 때마다 가슴속에서 쇳소리가 났을 거예요. 하지만 그의 눈은 불타올랐답니다. 몽마르뜨의 보헤미안들 사이에서 그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자유로워졌어요.

카페의 담배 연기가 자욱한 어느 저녁, 피카소와 마주 앉았을 때를 상상해봐요. 두 천재의 눈빛이 공중에서 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을 일으켰을 거예요. 질투와 경쟁, 존경과 반발—그 복잡한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죠.

그때 그는 아프리카 조각을 처음 보았어요. 그 순간이 마치 번개가 치듯 그의 영혼을 관통했답니다. 길게 늘어진 얼굴, 아몬드처럼 가늘고 긴 눈—그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그의 내면이 외부 세계와 만나 일으킨 화학반응이었어요.


몽파르나스, 새로운 시작과 사랑

몽파르나스로 이주한 건 마치 새로운 계절로 접어든 것 같았어요. 하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그의 몸속 병마는 떠나지 않았답니다. 기침 소리가 작업실 벽에 부딪쳐 되돌아올 때마다, 그는 더 깊이 붓을 캔버스에 눌렀을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잔 에뷔테른이 그의 삶에 걸어 들어왔어요. 마치 회색빛 하늘을 가르고 쏟아지는 한 줄기 햇살처럼요. 그녀의 발걸음은 나뭇잎 위를 걷는 것처럼 조용했지만, 그의 심장은 폭풍우가 지나가듯 요동쳤답니다.

잔의 눈빛에는 깊은 숲의 호수처럼 고요하고 깊은 무언가가 담겨 있었어요. 그녀는 말없이 그의 곁에 앉아 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죠. 그녀의 존재는 마치 겨울밤 난로의 불처럼 따뜻했어요. 그의 가난도, 병도, 세상의 냉대도 그녀의 사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사랑은 때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밟고 걷는 것 같았어요. 첫 전시회가 열렸던 날, 그는 떨리는 손으로 넥타이를 매었을 거예요. 가슴이 터질 듯 뛰었겠죠. 하지만 전시장 앞에는 분노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의 누드화들은 외설이라는 낙인이 찍혔어요. 그날 밤 잔의 품에서 그는 아이처럼 울었을지도 몰라요.

전쟁이 터지고 파리는 어둠에 잠겼어요. 가스등 불빛조차 희미해진 거리를 걸으며, 그들은 서로의 손을 꽉 쥐었답니다. 배고픔이 뱃속을 갉아먹었지만, 사랑만은 시들지 않았어요.

1920년 1월의 어느 추운 밤, 모딜리아니의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졌어요. 마치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흔들리듯이요. 잔은 그의 손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죠. 그녀의 눈물이 그의 창백한 손등 위로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어요.

이틀 후, 잔은 높은 창문 밖을 내다보았어요. 파리의 하늘이 잿빛으로 흐려져 있었죠. 그녀는 한 발을 창틀 위에 올렸어요. 그리고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듯, 몸을 공중으로 던졌답니다. 그녀의 몸이 바람을 가르며 떨어질 때,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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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DKIN 박물관 전시회 방문기

전시회 첫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어요. 가슴이 콩닥거렸답니다. 마치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소녀처럼요. 거울 앞에서 목도리를 몇 번이나 다시 둘렀는지 몰라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서 매듭이 자꾸 풀렸거든요.

메트로 역에서 내렸을 때,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갔어요. 낙엽들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며 부서졌죠. 약 10분을 걸었어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답니다.

작은 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잠시 멈춰 섰어요. 좁은 입구에 긴 줄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죠. 사람들의 입김이 하얀 연기처럼 공중에 피어올랐어요. 다행히 사전 예약 덕분에 비교적 빨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답니다.

전시장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어요. 마치 다른 시대로 순간이동한 것처럼요. 희미한 조명 아래 걸린 초상화들이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 눈빛들이 마치 "오래 기다렸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답니다.

첫 번째 작품 앞에 섰을 때, 무릎이 살짝 꺾이는 것 같았어요. 길고 가느다란 목을 가진 여인이 캔버스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죠. 그녀의 눈은 아몬드처럼 길었고, 그 속에 깊은 우울이 고인 물처럼 고여 있었어요. 나는 숨을 죽이고 그 눈을 들여다보았답니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친구의 얼굴을 다시 발견한 것 같았어요.

조각 작품들 앞에서는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어요. 오시프 자드킨의 기하학적인 형태들이 빛과 그림자를 날카롭게 나누고 있었죠. 모딜리아니의 부드러운 곡선과는 대조적이었어요. 하나는 물처럼 흐르고, 하나는 바위처럼 단단했답니다.

전시장을 천천히 걸으며, 나는 모딜리아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어요. 붓 자국 하나하나에 그의 숨결이 배어 있었죠. 어떤 작품 앞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어요. 왜 그랬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답니다. 그저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어요.


예술이 전하는 메시지

전시장을 나올 때쯤, 아쉬움이 가슴을 조였어요. 교과서에서 보았던 몇몇 대표작들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마치 긴 시를 읽는데 중요한 연들이 빠진 것 같았답니다.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발걸음을 옮기며 문득 생각했어요. 만약 그가 더 일찍 인정받았더라면? 만약 그림들이 불티나게 팔렸더라면? 만약 병마가 그를 일찍 놓아주었더라면? 그리고 무엇보다, 만약 잔과 함께 행복한 노년을 맞이할 수 있었더라면?

하지만 그 '만약'들은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덧없었어요. 그가 남긴 작품들은 바로 그 고통과 사랑, 절망과 희망이 뒤엉킨 실타래 속에서 태어났으니까요. 비극이 없었다면 그 깊이도 없었을 거예요.


예술과 삶의 교차점

전시회를 나서니 어느새 황혼이 파리를 물들이고 있었어요. 하늘이 라벤더색과 장밋빛으로 번져가고 있었죠. 거리의 가스등이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어요.

아랍 식당의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향신료의 진한 향기가 나를 감싸 안았어요. 케밥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따뜻한 고기 즙이 입안에 퍼졌답니다. 배고픔이 채워지면서 온몸에 따스함이 퍼져나갔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메트로 안, 창밖으로 보이는 파리의 불빛들이 물결처럼 흘러갔어요. 나는 가방 속 전시회 팸플릿을 만지작거렸답니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이 낯설지 않았어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행복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이런 순간들이 아닐까요. 오랜 꿈을 이루고, 아름다운 예술을 만나고, 배고픔을 채우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오는 이 평범하지만 기적 같은 하루 말이에요.

파리를 방문한다면, 이 전시회를 놓치지 마세요. 보헤미안 화가의 자유와 비극이 켜켜이 쌓인 작품들 속에서, 당신도 예술과 삶이 교차하는 그 지점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은 단순히 그림을 보는 경험이 아니라, 한 영혼이 남긴 깊은 울림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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