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3월의 설렘
"엄마, 진짜 추워!" 딸이 외투 깃을 바짝 세우며 투덜거렸다. 3월의 보르도는 여전히 겨울 꼬리를 붙잡고 있었다. 두꺼운 옷이 정말 필요한 날씨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몸은 오들오들 떨렸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언가 따뜻한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바로 설렘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가슴이 뛰어본 게?
파리에서 기차에 몸을 맡긴 지 3시간. 창밖으로 스쳐가는 프랑스의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터였을까? 일상이 이렇게 밋밋해진 게? 매일 아침 울리는 알람, 출근길 지하철, 반복되는 업무... 어느새 내 삶은 정해진 루틴의 연속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지금, 이 기차 안에서 느끼는 이 떨림은 뭐지? 딸아이도 며칠 전부터 "엄마, 보르도 여행 언제 가?" 하며 손꼽아 기다렸다. 아, 맞다. 이게 바로 여행이 주는 마법이구나.
"보르도 와인."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단어다. 나 역시 그저 귀에 익숙한 브랜드, 와인병 라벨에서 봤던 지명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보르도 중앙역에서 첫 발을 딛는 순간, 이 도시가 품고 있는 깊은 숨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공기부터 달랐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가론강의 습기, 그리고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조화. 이건 파리와는 완전히 다른 향기였다.
보르도를 여행하기 위해 미리 찾아본 자료들이 이제 눈앞의 현실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도리어 준비 과정에서 보르도에 대한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알게 된 것 같아 더욱 뜻깊었다. 12세기부터 시작된 와인의 역사, 13~14세기의 번영과 성장, 17~18세기의 무역 중심지로서의 역할... 이 모든 배경지식이 이제는 살아있는 현실로 다가왔다.
보르도역에서 나오자마자 마주한 웅장한 건물이 바로 보르도 시청이었다. 와, 이렇게 멋진 시청이 있다니! 클래식한 프랑스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건물 앞에서 딸과 나는 잠시 발을 멈췄다. "엄마, 여기가 시청이야? 궁전 같은데?" 딸의 말이 맞았다. 한국의 시청 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웅장함과 우아함이 있었다. 이 건물 하나만 봐도 이 도시가 얼마나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느껴졌다.
드디어 와인 박물관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8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곳 사람들이 한 가지 일에 쏟아부은 혼신의 힘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로 만든 레드 블랜드, 소비뇽 블랑과 세미용으로 만든 드라이 화이트 와인... 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도구들과 설명을 보며, 이 모든 이름들이 단순한 포도 품종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중세 시대에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 보르도 와인을 사러 대서양을 건너왔다는 전시 내용을 보며 감탄했다. 13세기와 14세기, 보르도의 번영과 성장의 시기에 와인이 이 지역의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이 되었다니. 17세기와 18세기에는 설탕, 향신료, 담배 같은 상품들과 함께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와인 한 병에 이런 역사가 담겨있다니." 딸이 중얼거렸을 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마시는 건 단순한 술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이 발효된 삶의 향기라는 걸.
현재 보르도에는 7,000개 이상의 와인 생산 공장이 있고, 매년 약 7억 병의 와인이 생산된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숫자로만 봐도 압도적이지만, 박물관에서 본 와인 제작 과정의 섬세함과 정성은 정말 예술 그 자체였다. 각 병마다 다른 맛과 향을 만들어내기 위한 포도농부들과 와인메이커들의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박물관을 나오며 생각했다. 이제 보르도 와인을 마실 때마다 이 감동이 함께 떠오를 것 같다고.
Place de la Bourse 앞에 서자,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18세기 신고전주의 건축의 진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건축가 빅터 루이스가 설계한 이 건물들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250년이 지난 건물이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조각들,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건물의 배치,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의 흔적을 견뎌내며 여전히 당당하게 서 있는 그 위엄이 압도적이었다.
"엄마, 저기 봐!" 딸이 흥분해서 가리킨 곳엔 거울 같은 분수대가 있었다. Miroir d'eau. 물 위로 비친 건물들이 하늘의 구름과 어우러져 한 폭의 인상주의 그림 같았다. 비록 물쇼는 없었지만, 그 고요한 물면에 반사된 건축물들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오히려 고요한 평온함이 더 깊은 감동을 주는 것 같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의 가치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마주친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문도 인상적이었다. 비록 파리의 그것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보르도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이 문을 지나며 "여기도 나름의 역사가 있겠구나" 싶었다. 프랑스의 각 도시마다 가진 고유한 정체성이 이런 건축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 같아 더욱 흥미로웠다.
그리고 시내에서 만난 그 크고 멋진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신성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높은 천장,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정교한 조각들... 어떻게 이런 건물을 만들 수 있었을까? 중세 시대 장인들의 혼과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딸도 평소보다 조용해져서 경건한 마음으로 성당 내부를 둘러봤다. "엄마, 여기 진짜 신기해." 아이 목소리에도 경외감이 섞여 있었다.
성당에서 나오며 생각했다. 종교를 떠나서, 이런 공간들이 주는 평안함과 숭고함은 무엇일까? 아마도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도하고 성찰하며 만들어낸 어떤 에너지 같은 것일까? 그래서 여행에서 만나는 성당들이 항상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보르도의 트램 TRM은 정말 놀라웠다. "5유로로 24시간이나 탈 수 있다고?" 딸이 트램 티켓을 손에 들고 신기해했다. 도시 전 지역뿐만 아니라 도외 지역까지 운영되고 있어서, 마치 보르도 시민이 된 것처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트램이 움직일 때마다 창밖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트램을 타고 보르도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가장 감동받은 건 다리 위에 설치된 멋진 구조물이었다! 유명한 장소들과 다리를 연결해주는 화려한 설치물들.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은 확실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만들어진 이 조형물들이 고풍스러운 보르도의 건축물들과 이렇게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다니. 예술이란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구나 싶었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보이는 이 구조물들은 마치 보르도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 같았다. 전통적인 석조 다리 위에 현대적인 예술 작품이 설치된 모습에서, 이 도시가 얼마나 조화롭게 발전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옛것과 새것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더 큰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트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마치 움직이는 그림 같았다. 현대적인 유리건물들과 고풍스러운 석조건물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모습, 트램 정류장마다 다른 분위기를 자랑하는 각각의 동네들... 이 편리한 대중교통 덕분에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보르도의 다양한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보르도의 맛들! "이게 바로 카넬레구나!" 작은 케이크를 한 입 베어물었을 때의 그 달콤한 충격이란. 작은 케러멜로 처리한 이 케이크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캬라멜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보르도의 대표적인 특선 요리였다. 한 입 한 입 씹을 때마다 보르도 사람들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르카송 해변에서 온 굴 요리는 또 어땠을까. 레몬 한 방울 떨어뜨린 싱싱한 굴을 입에 넣는 순간, 바다 내음 가득한 그 맛에 딸과 나는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이런 게 진짜 바다 맛이구나." 앙트레 코트 보르들레즈를 먹으며 이 지역 와인 한 모금을 곁들였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음식과 와인이 만나 완성되는 하나의 예술을. 풍부한 와인 소스에 절여진 스테이크의 부드러운 식감, 그리고 그것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보르도 와인의 깊은 맛.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많다는 이 도시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아침만 해도 '보르도'는 그저 지도 위의 점 하나, 와인병 라벨에서 봤던 지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정겨움이 느껴진다. 보르도 시청의 웅장함, 와인 박물관에서 느낀 감동, Place de la Bourse의 아름다움, 다리 위 설치물들의 예술성, 성당의 신성함...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내 마음 속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왜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답이 보였다. 이곳 사람들의 삶을 직접 만지고, 느끼고, 맛보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관광지를 구경한 게 아니라, 800년간 이어진 이들의 이야기 속에 잠시나마 함께했기 때문이다. 트램을 타고 출근하는 직장인들, 성당에서 기도하는 시민들, 카페에서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그들의 일상 속에 우리도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 같았다.
'보르도 와인'이라는 어휘가 이제는 단순히 귀에 익숙한 단어가 아니다. 와인 박물관에서 본 포도농부들의 땀과 노력, 800년 역사의 무게, 그리고 한 병 한 병에 담긴 정성...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막상 직접 방문하면서 보르도 시내를 돌아보니 이 도시와 더욱 친숙해진 느낌이 든다. 그게 바로 여행의 마법이 아닐까?
"벌써 떠나야 해?" 딸이 아쉬워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하루였는데, 이렇게 많은 것들을 안겨줄 줄 누가 알았겠나. 보르도역 플랫폼에 서서 마지막으로 이 도시의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여전히 차가운 3월의 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마음만은 포근했다. 가슴 한 켠에 따뜻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바로 보르도에서의 힐링 여행이 준 선물이었다.
여행이 주는 진짜 선물은 무엇일까? 예쁜 사진도, 맛있는 음식도 아니다. 물론 그것들도 소중하지만, 더 큰 선물이 있다. 바로 조금은 지루했던 일상에 생기를 주는 것, 살아있다는 느낌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다. 보르도에서 보낸 하루는 정말로 내 일상에 생기를 주었다.
"안녕, 보르도!" 기차 창밖으로 멀어져가는 도시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고마웠다. 다시 설레게 해줘서. 다시 감사하게 해줘서.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일상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줘서.
파리로 향하는 기차 안. 딸은 어느새 창가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평화로운 얼굴로 꿈속에서도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 아이에게도 오늘이 특별한 하루였나보다.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내일부터의 일상이 더 이상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는 걸. 보르도에서 받은 이 따스한 감동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니까.
때로는 멀리 떠나야 가까운 것들이 보인다. 보르도는 내게 그런 거리를 선물해준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