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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한옥카페에서 찾은 조용한 쉼표

우연한 발걸음이 이끈 특별한 만남

by Selly 정

그날도 어김없이 바쁜 일상에 치여 살고 있던 나는, 문득 '진짜 쉼'이 무엇인지 잊고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 속 일정표는 빼곡했고, 마음은 계속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내가 광주 양림동 골목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마주한 것이 바로 '호양호림'이었다.

처음 마주한 한옥의 첫인상은 마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회색 기와가 포근하게 올려진 지붕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나무 기둥들은 오랜 세월을 견뎌온 듯 든든하게 서 있었다. '호양호림'이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을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설렘이었다.


IMG-20250913-WA0023.jpg [따스한 오후 햇살을 받은 한옥 외관]


전통 속에서 피어나는 현대적 감동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높은 천장 위로 펼쳐진 서까래들이 마치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 톡톡, 똑똑...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이 공간의 고요함을 더욱 깊게 만들어주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빛이었다. 한지로 만든 창호지를 통해 스며드는 햇살이 실내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치 자연이 직접 조명을 켜준 것 같은 따스함이었다. 좌식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느꼈던 그 포근함이 살며시 되살아났다.

전통 한옥의 뼈대는 그대로 두면서도, 현대적인 가구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아, 이게 바로 온고지신이구나.' 옛것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새것을 받아들이는 지혜. 그것이 바로 이 공간이 주는 첫 번째 선물이었다.



IMG-20250913-WA0024.jpg [서까래와 현대적 조명이 어우러진 카페 내부]


한 잔의 커피에서 찾은 삶의 철학

메뉴판을 펼치니 세계 각국의 원두들이 정성스럽게 소개되어 있었다. 브라질, 에티오피아... 지구 반대편에서 온 원두들이 이곳 양림동 한옥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주문한 브라질 원두 커피가 나오기까지의 시간이 참 소중했다. 급하게 마시는 테이크아웃 커피가 아니라, 정성스럽게 우려내는 시간을 기다리는 여유. 그 기다림 속에서 내 마음도 서서히 진정되어 갔다.

투명한 유리 서버에 담긴 커피를 보는 순간, 마치 작은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진한 갈색 빛깔이 햇살과 만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첫 모금을 입에 머금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깊고 부드러운 맛. "아, 이게 바로 진짜 쉼의 맛이구나."

커피 옆에 놓인 작은 카드에는 이 원두가 걸어온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브라질의 햇살을 받고 자란 커피체리가 우여곡절 끝에 이곳까지 왔다는 것. 그 과정을 읽으며 문득 생각했다. 우리 인생도 이 커피처럼, 여러 과정을 거쳐 지금의 맛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IMG-20250913-WA0022.jpg [정성스럽게 우려낸 브라질 커피와 원두 이야기 카드]


호양호림에서 배운 인생의 지혜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머물렀던 호양호림에서 나는 소중한 것들을 배웠다. 첫째는 '기다림의 미학'이었다. 빠름이 미덕인 세상에서 천천히 우려내는 커피 한 잔의 소중함. 둘째는 '조화의 아름다움'이었다. 전통과 현대가 서로를 해치지 않고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힘'을 배웠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눈앞의 풍경에, 코끝의 향기에, 입안의 맛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치가 아닐까 싶었다.

카페를 나서며 뒤돌아본 호양호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요히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또 언제든 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가슴 속에는 따스한 여운이 남았고, 마음에는 새로운 다짐이 생겼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런 '쉼표' 같은 시간들을 더 자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런 소중한 공간을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

호양호림 한옥 카페,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는 작은 성소였다. 혹시 당신도 삶에 지쳤다면, 양림동 골목길을 걸어보시길. 그리고 호양호림 문을 두드려보시길. 그곳에서 당신만의 소중한 쉼표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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