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파리 유학생, 늦어도 괜찮아 시리즈~

붉은 빛, 검은 선반- 들라크루아의 아틀리에에서

by Selly 정

낭만의 시간 속으로


"들라크루아! 피의 호수, 악마들이 사는 곳,
영원히 푸른 전나무 그늘 아래,
기묘한 팡파르가 지나가는 곳,
베버의 한숨처럼."
— 샤를 보들레르, 「등대」 중에서


비가 내리는 파리의 오후였다. 우산을 접고 들어선 생제르맹의 좁은 골목은 마치 19세기로 통하는 비밀 통로 같았다. 석조 건물 사이로 흐르는 빗물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가 어우러져 묘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50대에 시작한 파리 유학 생활 중, 나는 종종 이런 비 오는 날이면 미술관을 찾곤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외젠 들라크루아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은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메트로역에서 내려 골목을 헤매다 보니, 이곳이 관광객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파리지앵들의 은밀한 안식처라는 걸 직감했다. 루브르나 오르세처럼 웅장한 건물도, 긴 줄도 없었다. 다만 작고 아담한 2층 건물 하나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간이 멈춘 듯했다.

첫 번째 방에 걸린 '아나크레온과 젊은 여인'이 나를 맞이했다. 들라크루아 특유의 붉은빛이 캔버스를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와인이 잔을 넘치듯, 그의 색채는 프레임을 벗어나 공간 전체를 물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50년을 살면서 보았던 수많은 색들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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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파멸의 순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앗시리아의 왕은 침대에 기대어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첩들의 나신이 불꽃처럼 화면을 가로질렀고, 보석들은 마지막 빛을 발하며 흩어졌다. 폭력과 관능, 절망과 황홀이 한 화면 안에 소용돌이쳤다. 1828년 파리 살롱에서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왜 충격을 받았는지 이해가 갔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감정의 폭풍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안전한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칼날 같은 아름다움, 불처럼 타오르다 재가 되는 순간의 장엄함을 포착했다.

작은 방을 하나씩 지나며 나는 그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사용했던 책상이 있었고, 그가 읽었던 책들이 서재에 꽂혀 있었다.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케치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프랑스 화가의 붓이 다시 쓴 것이었다. 사랑과 죽음, 광기와 복수—들라크루아는 언어가 아닌 색으로 그 모든 것을 번역했다.


그리고 쇼팽의 초상화가 걸린 방에 이르렀다.

1838년, 들라크루아는 친구 쇼팽의 얼굴을 캔버스에 담았다. 초상화 속 쇼팽은 멜랑콜리한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폴란드를 떠나온 망명 음악가의 눈빛. 고국을 잃은 자의 슬픔이 그 눈 속에 고여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그 슬픔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술가란 어쩌면 영원한 망명자니까.

두 사람은 1830년대 파리 사교계에서 만났다. 화가와 작곡가. 색채와 음표. 겉보기엔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두 예술가였지만, 그들은 서로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쇼팽은 들라크루아의 아틀리에를 자주 찾았고, 물감 냄새가 진동하는 작업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들라크루아는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서서 쇼팽의 녹턴을 들었다. 음악이 색이 되고, 색이 음악이 되는 순간들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쇼팽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내가 그려야 할 색들이 보인다." 쇼팽 역시 들라크루아의 그림 앞에서 새로운 선율을 떠올렸다. 예술가들의 우정이란 이런 것이었다. 서로의 창조를 자극하고, 서로의 고독을 이해하고, 서로의 광기를 존중하는 것.

1849년, 쇼팽이 서른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들라크루아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는 쇼팽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친구를 그리워했다. 쇼팽의 초상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정의 기록이었고, 사라진 시간에 대한 애도였으며, 두 예술가가 함께 나눈 모든 대화의 흔적이었다.

나는 초상화 앞에 오래 서 있었다. 50대에 파리에 와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라크루아와 쇼팽처럼, 진정한 연결은 나이나 언어를 초월하는 것 같았다. 예술이, 음악이, 그림이 우리를 이어주듯이.


정원으로 나가는 문이 열려 있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작은 정원의 나무들이 빗물에 젖어 더욱 짙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미술관 직원이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본 그림들을 떠올렸다. 50대에 파리에 온 것,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다시 학생이 된 것. 어쩌면 나도 내 안의 무언가를 불태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을 나설 때, 비는 그쳐 있었다.

젖은 돌바닥이 석양 빛을 반사하며 금빛으로 빛났다. 골목 모퉁이의 꽃집에서는 장미 향이 흘러나왔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들라크루아가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된 이유는 단순히 기법이나 주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삶이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걸, 파멸 속에도 숭고함이 있다는 걸, 격렬한 감정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것이라는 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50대에 파리에서 유학하는 것도 어쩌면 낭만주의적 모험일지 모른다. 안전한 삶을 뒤로하고, 불확실함 속으로 뛰어드는 것.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미소 지었다. 들라크루아 미술관은 유명하지 않았다. 관광객들은 루브르로 갔고, 인스타그래머들은 에펠탑으로 갔다. 하지만 이곳에는 진짜 파리가 있었다. 조용하고, 은밀하고, 깊은 파리.

그리고 나는 오늘, 그 파리의 심장 하나를 만지고 온 것 같았다.

붉은 빛, 검은 건반—들라크루아의 아틀리에에서

붉은 빛, 검은 건반—들라크루아의 아틀리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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