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2화. 그래도 가겠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있는 경자의 옆에서 남편 김정수가 책을 읽고 있었다.
『사피엔스』였다. 최근 들어 자주 읽는 책이었고, 인류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두꺼운 책이었다. 침대 옆 스탠드만 켜져 있어서 방은 어두웠고, 노란 불빛이 은은하게 남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남편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바스락 들렸고, 그 모습이 그림자로 벽에 비쳤다.
경자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천장에는 형광등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내일이면 서울에 간다. 여의도 오피스텔을 본다. 오후 2시에 조영달 소장을 만난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다.
"여보."
경자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응?"
김정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책장을 넘겼다. 바스락. 경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야 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알게 될 것이다.
"나... 내일 그 오피스텔 보러 가."
김정수는 책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책갈피를 끼우고 경자를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 남편의 얼굴 표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경자는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이 놀란 것을, 그리고 화가 난 것을.
"경자야." 남편의 목소리가 낮았다. 화난 건 아니었지만 단호했다.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삼십 년 결혼생활 동안 경자가 익히 아는 남편의 목소리, 이미 결정했을 때 내는 그 목소리였다. "나는 여전히 반대야."
"알아." 경자가 작게 말했다. "근데 일단 보기만 할게. 실물 보고 나서 결정할게."
김정수는 깊고 긴 한숨을 쉬었다. 어둠 속에서 그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치 집 전체에 퍼지는 것 같았다.
"경자야." 남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지금까지 빚 없이 살아왔잖아."
"응."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큰 빚을 지면..." 남편이 말을 멈췄다. "어떡해?"
경자는 남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남편의 실루엣이 보였다. 등이 조금 굽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남편도 늙어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보, 그게 투자야. 지금 안 사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후회는 무슨..." 김정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민수 말 들었잖아. 약사 선배들도 힘들어한다고. 매달 갚는 게 엄청 많대."
"그분들은 아마 여러 채 샀을 거야." 경자가 말했다. "욕심이 과했던 거지. 나는 한 채만 사는 거야."
"한 채도 많아."
침묵이 흘렀다. 경자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 말해야 했다. 진짜 이유를. 노후에 대한 두려움을.
"여보." 경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보 퇴직하고 나면... 우리 수입이 뭐가 있어?"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국민연금?" 경자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걸로 40년을 어떻게 살아? 나도 벌써 50대 중반이 넘어가고 있어. 당신도 60을 향해 가고 있고. 은퇴할 나이가 점점 가까워오고 있잖아." 경자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우리 4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데... 그걸 뭘로 살아?"
침묵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나는 그게 무서워." 경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늙어서... 돈 없이... 아이들한테 손 벌리는 거... 그래서 지금 하는 거야. 지금 조금 힘들어도... 나중에 월세라도 받으면... 그럼 우리 살 수 있잖아."
김정수는 한숨을 쉬었다. "알아. 나도 생각했어. 퇴직하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실 김정수도 요즘 그 생각뿐이었다. 회사에서 일하다가도 문득 생각했다. '나는 몇 년이나 더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60이 코앞이었다. 외국계 회사는 정년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말뿐이라는 걸 김정수는 알고 있었다. 55세쯤 되면 슬슬 은퇴 압박이 들어온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김정수는 『사피엔스』를 읽으며 생각했다. 인류는 수만 년을 살아왔지만, 현대인의 은퇴 후 삶은 고작 몇십 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문제였다. 그 문제를 자신도 곧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제야 노후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그동안 일만 하느라,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다 보니 노후에 대해 너무 무심했던 것은 인정한다. 경자의 말이 맞다. 국민연금만으로는 부족하다. 뭔가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피스텔이 과연 그 답일까? 김정수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파트도 아닌 오피스텔을, 그것도 갭투자로 산다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갭투자. 그 말 자체가 위험하게 들렸다. 전세가 빠지면? 집값이 떨어지면? 임차인이 안 나타나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경자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김정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경자야. 우리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어? 성실하게 살았잖아. 빚도 안 지고. 아이들 키우느라 힘들었지만 그래도 버텼어." 남편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큰 빚을 지면... 만약 잘못되면 어떡해? 집값이 떨어질 수도 있어. 임차인 못 구할 수도 있고."
"그건..."
"경자야, 나는 부동산을 잘 모르겠어." 김정수가 솔직하게 말했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고. 그냥... 성실하게 일만 했으니까.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거야. 내가 모르는 일이니까."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경자야... 아파트도 아니고 오피스텔이잖아. 오피스텔은 아파트보다 더 위험하다던데. 전세가 잘 안 나간다고도 하고. 관리비도 비싸다고 하고." 김정수는 걱정이 앞섰다. "천천히 모으면 안 될까? 위험한 일 말고. 아니면 차라리 아파트를 보든지..."
침묵이 흘렀다. 김정수가 침대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남편의 실루엣이 더 크게 보였다.
"당신 월급이 얼마야?" 남편이 물었다. "매달 얼마를 갚아야 하는데?"
경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막혔다.
"당신이 휴게실에서 계산하던 거 봤어." 김정수가 말했다. "메모지에 적어놓은 거. 월 상환액. 10년 동안."
'들켰구나.' 경자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숨이 막혔다.
"당신 월급에서 절반을 갚으면..." 남편이 말을 이었다. "남는 게 뭐야? 거기서 교통비, 통신비, 용돈... 당신 생활은 어떻게 해?"
"여보가 있잖아..." 경자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내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김정수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우리 합쳐서 얼마야? 거기서 당신 대출 갚고, 수진이 학비 주고, 생활비 주고... 남는 게 얼마 안 돼. 빠듯해."
침묵이 흘렀다. 김정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경자야. 수진이도 이제 대학생인데... 알바 같은 거 해보는 게 어떨까?"
"알바?" 경자는 깜짝 놀라 남편을 쳐다봤다. 어둠 속이었지만 남편의 눈빛이 느껴졌다.
"응. 요즘 대학생들 다 하잖아. 카페든, 편의점이든, 과외든. 한 달에 조금씩이라도 벌면..."
"수진이 과제가 많아서..."
"그래도 주말에 조금씩이라도." 남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생각해봐, 경자야. 당신 부담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잖아."
경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남편 말이 맞았다. 만약 수진이가 알바로 조금만 벌어줘도 남는 돈이 조금 늘어난다.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겠네...' 하지만 딸에게 그 말을 어떻게 꺼내지? 엄마가 무리하게 투자해서 그 때문에 너마저 알바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수진이한테... 미안해서..."
김정수는 한숨을 쉬었다. "경자야, 수진이도 이제 스무살이야. 알바로 사회 경험 쌓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오빠들도 대학 때 다 알바 했잖아." 그가 말을 멈추더니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만약 임차인 못 구하면? 그럼 당신 혼자 그걸 다 감당해야 돼!"
그 말이 경자의 가슴을 찔렀다. 날카로웠다. 칼처럼.
"그때는 수진이한테 알바 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남편이 말을 멈췄다. "등록금조차 버거워질 수도 있어."
경자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공실 안 생겨. 여의도는 수요가 많다고 했어. 조 소장님이 그랬어."
"중개사 말을 어떻게 믿어!" 김정수가 소리쳤다. 어둠 속에서 그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돈 벌려고 하는 소리야! 당신한테 이득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한테 이득이 되는 거라고!"
경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중개사는 수수료를 받는다. 집이 팔려야 돈을 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경자는 그 오피스텔이 좋았다. 한강이 보이는 그 집이 좋았다. 미래의 자신이 그 집에서 월세를 받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자야..." 김정수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화가 가라앉은 것 같았고, 대신 슬픔이 묻어났다. "나는 당신이 실패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당신이 십이 년 동안 모은 돈... 다 날아가는 거 보고 싶지 않다고."
"날아가지 않아." 경자가 말했다. "부동산은 올라. 미숙이 엄마 친구도 그랬잖아. 작년에 샀는데 올해 많이 올랐다고."
"그건 작년 이야기야. 올해는 다르잖아. 뉴스 안 봐? 요즘 집값 떨어진다고 난리야."
"일시적인 거야."
"금리도 계속 오르고."
"금방 다시 올라."
김정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시 누웠다. 경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 등이 차가워 보였다. 마치 벽 같았다. 넘을 수 없는 벽.
"여보..." 경자가 작게 불렀다.
"경자야." 김정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멀게 들렸다. 마치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반대야. 하지만 당신이 꼭 하겠다면... 나는 말릴 수 없겠지."
침묵이 흘렀다. 무겁고 차가운 침묵이었다.
"대신 책임은 당신이 져." 남편이 다시 말했다. "실패해도 나한테 탓하지 마."
그 말이 경자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날카로운 칼처럼. '책임... 내가 져...' 경자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남편의 등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고, 그 등과 자신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경자는 혼자였다. 남편과 한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경자는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