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파리 유학생, 늦어도 괜찮아~ 시리즈

한 방울의 무게

by Selly 정

수도꼭지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손끝에 닿는 순간, 온몸이 움찔한다. 겨울의 물은 시원함이 아니라 칼날이다. 얼른 손잡이를 돌린다.

서서히 따뜻해지는 물속에서, 손가락들이 슬슬 긴장을 풀기 시작한다. 서로 끌어안기도 하고, 둥글둥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물과 장난을 친다. 물 만난 고기라는 말이 딱 이런 거다. 따뜻한 물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뚝으로 번져갈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행복 속에 있다.


나는 유독 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취미가 뭐예요?" 누군가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사우나요." 씻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다. 물속에 있는 것, 희미한 안개 속에서 피부에 닿는 촉촉한 물기의 느낌, 미지근한 물이 온몸을 감싸줄 때의 그 편안함.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그런데 파리에는 한국식 찜질방이 없다. 고급 스파만 있을 뿐, 보통 사람이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사우나는 어디에도 없다. 4년 동안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유일한 낙은 집에서 욕조에 물을 받는 것이었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수도꼭지만 틀면 한없이 물이 쏟아져, 피로도 외로움도 함께 씻겨 보낼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물이 귀한 줄 몰랐다.


지금 사는 집에는 드럼통 같은 물통이 있다. 뜨거운 물이 나오다가, 어느 순간 차가운 물로 돌변한다. 몸이 움츠러들고, 얼른 수도꼭지를 잠근다. "더 큰 물통으로 바꿀 수 없나요?" 물어봤지만, 돌아온 건 아쉬운 한마디뿐이었다.


처음에는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작은 물통의 물은 함부로 쓸 수 없는 물이 되었다. 귀한 만큼 더 천천히, 더 감사하게 쓰게 되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그 짧은 시간이, 이전보다 훨씬 깊은 행복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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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할 때는 몰랐던 것을, 부족해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물이 그랬다. 파리 생활이 그랬다. 어쩌면,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

가득 차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고, 비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한 방울의 무게를 알게 되는 것. 50대가 되어서야 깨닫는 것들이 자꾸 늘어난다. 늦게 알았다고 늦은 건 아니다. 지금, 이 한 방울의 따뜻함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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