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파리 유학생, 늦어도 괜찮아 시리즈~

소방차를 부른 여자

by Selly 정

파리 생활 6년째, 나는 소방차를 불렀다.

아니, 정확히는 불린 거지만.

그날은 평범한 하루였다.

병아리콩을 인덕션 위에 올려놓았다. 하루 동안 물에 불려둔 콩이라 금방 익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덕션 온도를 가장 높은 9로 설정하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피곤했다. 유튜브를 켜고, 책을 펼치고,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삐익— 삐익—

"대체 어디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나는 짜증을 냈다. 윗집인가. 옆집인가. 누가 저렇게 시끄럽게 하는 거지. 평온한 내 시간이 방해받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그런데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점점 더 커졌다. 귀를 찢는 것 같았다. 밖에서 무슨 일이 난 건가 싶어서 방문을 열었다.

거실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니, 하얀 게 아니었다. 연기였다. 부엌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뿌옇게 보이지 않았다. 화재 경보기가 미친 듯이 울고 있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병아리콩.


부엌으로 달려갔다. 냄비는 이미 새까맣게 타 있었다. 인덕션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급하게 인덕션을 끄고 냄비를 싱크대에 넣어 물을 틀었다. 훅. 냄비에서 거대한 연기가 다시 한번 치솟았다.

코와 입을 막고 집안의 창문이라는 창문은 다 열었다. 거실, 방, 화장실, 부엌. 열 수 있는 건 전부 다. 그래도 경보기는 멈추지 않았다. 귀가 아팠다. 결국 누전 차단기를 내렸다. 집 안의 모든 전기가 꺼졌다. 경보기가 점점 약해지더니, 겨우 멈추었다.

조용해졌다.

연기가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뭘 한 거지. 어이없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열어보니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4층에 사는 한국인이었다. 연기가 자기 집까지 올라왔다고 했다. 경보기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내려왔다고. 2층 우리 집 창문에서 나온 연기가 건물 벽을 타고 쭉 올라갔던 것이다.

거실 창문 밖으로 내다보니, 아파트 주민들이 전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다들 우리 집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들었어요."

거짓말을 했다. 잠든 게 아니라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차마 못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졌다.

"네? 소방차요? 아니, 왜요? 불이 난 것도 아닌데요!"

4층 남자가 말했다.

"여기 아파트가 거의 다 나무로 지어졌거든요. 연기가 나면 순식간에 다 탈 수 있어요."

그가 신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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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소방관 두 명이 올라왔다. 한 명은 복도에 서 있었고, 다른 한 명이 문 앞에 서서 말했다.

"봉주르!"

이 상황에 봉주르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었다.

"마담, 혼자 계신 건가요? 연기가 난 곳이 어디죠?"

부엌으로 안내했다. 소방관은 부엌, 거실, 복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4층 남자가 불어로 상황 설명을 도와주었다. 소방관은 누전 차단기를 다시 올리고, 전기가 정상 작동하는 걸 확인한 뒤에야 표정을 풀었다.

"다친 곳은 없으시죠?"

몇 번이나 확인하고, 웃으면서 돌아갔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방차가 우리 아파트 앞 골목을 꽉 막고 서 있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파리 골목은 좁다. 소방차가 들어오면 양쪽 차들이 꼼짝 못 한다. 몇 주 전에 나도 그런 상황에 갇혀서 한참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때 저 소방차 때문에 짜증 냈던 사람이, 오늘은 바로 나였다.

창문이 다 열려 있었지만, 나는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다. 혹시 누가 볼까 봐, 창문이 없는 복도 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해외 생활 17년.

냄비를 태운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연기가 자욱하게 찬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방차까지 온 건 처음이었다.

그 뒤로 달라진 게 있다.

인덕션 위에 뭔가를 올려놓으면, 이제 절대 부엌을 떠나지 않는다. 침대에 눕지 않는다. 유튜브를 켜지 않는다. 그 자리에 서서 냄비를 지킨다.

타버린 병아리콩 냄새가 집안 구석구석에 스며들어서 몇 주가 지나도 빠지지 않았다. 환기를 해도, 향초를 켜도, 커튼을 빨아도. 쾌쾌한 냄새가 코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미워지지 않았다.

나를 지키는 냄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잊지 마, 라고 매일 나한테 말해주는 냄새.

지금도 인덕션을 켤 때면, 병아리콩이 떠오른다.

새까맣게 탄 냄비, 하얗게 변한 거실, "봉주르!" 하며 문 앞에 서 있던 소방관.

그리고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복도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던 50대 파리 유학생.

50대에 파리에 와서 피아노를 배우고, 불어 시험을 준비하고, 매일 새로운 것을 공부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병아리콩을 태운다. 대단한 것도 아닌 일에 소방차가 오고, 이웃에게 고개를 숙인다.

늦깎이 유학생의 하루는 이렇게 생겼다.

멋지지 않고, 때로는 창피하고, 가끔은 소방차까지 온다.

그래도 괜찮다.

내일도 나는 병아리콩을 삶을 것이다.

이번에는 꼭 옆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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