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탈 털어도 남는 것
토요일 아침, 파리의 마르셰에 갔다.
바스티유 광장 옆으로 펼쳐진 노천 시장. 과일과 채소, 치즈와 올리브, 꽃다발과 허브들이 길 양쪽으로 끝없이 늘어서 있다. 11월의 찬 공기 사이로 상인들의 목소리가 활기차게 오간다.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캔버스 장바구니를 움켜쥐고, 사람들 틈을 천천히 걸었다. 딱히 뭘 사러 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걷고 싶었다. 파리의 아침 공기 속에서, 사람들의 체온이 섞인 시장의 온기 속에서.
그런데 한 좌판 앞에서 발이 멈추었다.
대추였다.
짙붉게 익은 대추들이 나무 바구니 안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다트(datte)라고 부르는, 북아프리카산 대추야자와는 다른 것이었다. 한국에서 보던 것과 꼭 닮은, 동그스름하고 통통한, 붉은빛 대추. 손을 뻗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매끈한 껍질 위로 가을 햇살이 응축된 듯한 짙은 붉은빛이 감돌았다. 코끝에 가져가자 달큰하고 묵직한 향이 올라왔다.
순간, 숨이 멈추었다.
부엌이 보였다. 엄마의 부엌이.
7월이었다. 한여름.
새벽부터 엄마는 부엌에 서 계셨다. 목을 감싸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하얀 면 앞치마를 걸치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 위에 하얀 삼각천을 두르고. 오늘은 할아버지 제삿날. 일 년 중 가장 많은 음식이 차려지는 날이다.
부엌 안은 전쟁터 같았다. 부침개 기름이 치직치직 튀고, 시금치나물과 고사리나물에서 고소한 향이 퍼져 나왔다. 토실하고 싱그러운 사과와 배가 쟁반 위에 가지런히 놓이고, 갖은 전들이 엄마의 손에서 쉴 새 없이 만들어졌다. 수증기가 자욱한 부엌 안에서 엄마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 손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엄마, 뭐 해?"
부엌을 기웃거리며 다가가면, 엄마는 갓 부친 명태전을 뜨거운 손으로 집어 내 손에 쥐어주셨다.
"오늘 할아버지 제사날이야. 저녁에 제사 끝나고 나면 많이 먹어. 지금은 안 돼."
안 된다고 하시면서도, 또 하나를 쥐어주셨다.
파리의 마르셰에서 대추 한 봉지를 샀다.
아파트로 돌아와 대추를 씻고, 생강을 얇게 저며,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켰다. 대추와 생강이 물속에서 천천히 우러나기 시작했다. 부엌에 달큰하고 따뜻한 향이 퍼졌다. 파리의 작은 부엌이, 순간 다른 곳이 되었다.
찻잔을 감싸 쥐고 창가에 앉았다. 갈색빛 대추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한 모금 마셨다. 달고 따뜻한 것이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 어딘가에 머물렀다.
이상한 일이다. 대추차를 마실 때마다, 울컥한다.
우리 집 앞마당에는 대추나무가 있었다.
대문에서 집까지 이어진 마당길을 따라 걸어 들어오면, 왼쪽에는 수돗가와 장독대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다양한 꽃들과 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부엌을 돌아 뒷마당에는 각종 채소를 심어놓은 텃밭과,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다. 가을이면 노랗다 못해 눈부실 정도로 온 마당을 물들이던 은행나무. 장독대의 정겨움. 사시사철 마당을 수놓던 꽃들의 향연.
하지만 그 모든 풍경 속에서, 유독 나를 흥분하게 한 것은 대추나무였다.
초가을로 접어들 때쯤이면 대추나무 가지가 휘어져 축 늘어졌다. 주렁주렁 매달린 대추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가 땅까지 늘어뜨려졌다. 손을 뻗으면 닿았다. 매끈하고 윤기 나는 팽팽한 초록 껍질. 햇살 받는 쪽만 살짝 붉게 물들기 시작한 타원형의 작고 단단한 열매. 그것을 입에 넣고 오독오독 씹을 때의 그 행복이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제사상에 놓아야 하니까 다 따 먹지 마!"
엄마의 호통이 마당에 울렸다. 잠깐 숨죽이다가, 엄마가 부엌으로 돌아가시면 다시 손이 올라갔다. 손에 닿는 대추들은 모조리 내 입속으로 사라졌다.
7남매 중 다섯째. 가녀린 체구에, 유독 대추를 사랑하는 아이.
엄마는 알고 계셨을까. 아마 알고 계셨을 것이다.
대추차가 식어간다. 파리의 오후 햇살이 찻잔 위로 비스듬히 떨어진다.
문득 생각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엄마가 나에게만 대추를 챙겨주시기 시작한 것이. 제사를 치르고 새벽에 일어나 제사 밥을 먹을 때마다, 내 앞에만 대추가 놓여 있었다. 설탕에 버무려진, 이제 막 익어가는 얼룩덜룩한 대추. 때로는 붉게 잘 익은 통통한 대추. 다른 형제들 앞에는 없었다. 오직 내 앞에만.
부엌을 기웃거리는 작은 손을 잡고, 엄마는 조용히 부엌 안으로 데려가셨다. 아무도 모르게 입속에 대추 한 알을 넣어주시고, 또 한 알을 손에 쥐어주시곤 얼른 나가라고 나무라셨다. 보물을 찾은 것처럼 대추 한 알을 꼭 쥔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해외로 나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명절에 한국에 들를 때마다, 엄마는 어김없이 대추를 내 앞에 놓으셨다. 남은 대추는 다른 명절 음식과 함께 보자기에 싸서 챙겨주셨다. 파리에서 한국에 와서 엄마 집을 방문할 때마다, 대추가 있으면 어김없이.
설탕이 너무 많이 묻어 있어서, 손가락으로 탈탈 털어가며 먹었다. 그래도 달았다. 대추보다 더 단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으니까.
엄마는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셨다.
치매가 찾아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사랑해"라는 말은 엄마의 사전에 없었다. 아마도 그 시대의 엄마들이 다 그랬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것이, 수줍고 쑥스럽고, 어쩌면 불필요하다고 느끼셨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가족이라고 믿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지금은 안다.
대추 한 알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였다. 손에 쥐어준 또 한 알이 "엄마가 너를 사랑하는 거 알지?"였다. 보자기에 싸서 챙겨주신 대추가 "멀리 있어도 너를 생각한다"였다.
엄마는 평생, 대추로 고백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엄마에게서 대추를 받을 수 없다.
엄마는 집에 계시지 않는다. 고관절을 다치신 이후, 엄마는 방문 예약을 해야만 만날 수 있는 곳에 계신다. 전화도 할 수 없다. 정신이 흐려지신 후에도 엄마는 막내딸을 알아보신다. 내가 가면 늘 같은 말씀을 하신다.
"미국에서 언제 왔어?"
엄마에게 나는 아직도 저 멀리 미국 땅에 살고 있는 딸이다. 파리가 아니라 미국. 엄마의 기억 속에서 나는 영원히 미국 사는 막내딸이다. 그것이 안쓰럽기도 하고, 어딘가 다행스럽기도 하다. 엄마의 기억 속에서 나는 여전히 자랑스러운 딸이니까.
냄비에 대추를 다시 넣었다. 생강 몇 조각을 더하고, 약한 불에 오래 끓인다. 파리의 작은 부엌에 달큰한 향이 천천히 번진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다. 따뜻하다. 한 모금 마신다. 달다. 그리고 조금 짠하다.
다행인 것은, 대추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리비아에서도, 튀니지에서도, 파리에서도. 내가 어느 나라에 있든, 대추는 늘 그곳에 있었다. 마치 엄마의 사랑이 국경을 넘어 나를 따라온 것처럼.
오늘 저녁, 딸에게 대추차를 끓여주어야겠다.
문득 생각한다. 딸에게 나의 '대추'는 무엇일까. 엄마가 말없이 대추 한 알로 사랑을 전했듯, 나도 딸에게 그런 것 하나쯤은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여행지에서 사준 작은 인형이 떠오른다. 그 인형은 세 나라를 거쳐 이사하는 동안에도, 딸이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다. 낡고 해어져도 버리지 않고, 어디를 가든 함께 데려갔다. 혹시 그것이 딸에게는 나의 대추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어쩌면, 모르는 것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도 당신의 대추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끝내 모르셨을 테니까.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주는 사람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받는 사람은 평생을 간직한다. 그 무심한 손길 하나가, 수십 년이 지나 파리의 어느 부엌에서 눈물이 된다.
대추차가 다 식었다. 한 잔 더 끓여야겠다. 오늘은 조금 더 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