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5%의 덫 2부. 조영달과의 만남

2부 1장: 여의도, 그 집

by Selly 정

KTX는 대구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렸다.

경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지난 몇 달 동안 빼곡하게 적어온 노트.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부분들, 별표 친 부분들, 접은 페이지들. 모서리는 이미 낡아서 휘어져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쓸었다. 거칠고 두꺼운 질감. 몇 달 동안의 밤들이 이 안에 들어 있었다.

확인할 것들:

한강뷰 실제로 보이는지 역까지 거리 — 도보 시간 주변 편의시설 건물 관리 상태 실내 상태 기존 임차인 정보 관리비, 소음, 일조량

열 가지 항목. 하나도 빠뜨릴 수 없었다. 4천 5백만 원짜리 결정이었으니까. 가진 전부를 걸고, 없는 돈까지 빌려서 하는 결정.

창밖으로 논밭이 빠르게 지나갔다. 갈색 들판, 앙상한 나뭇가지, 멀리 보이는 산. 익숙한 것들이 뒤로 밀려나고 낯선 것들이 다가왔다.

어젯밤 남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냥 보기만 해. 계약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마." 낮았지만 단호한 목소리. 민준이도 말했다. "엄마, 제발 신중하게." 민수도. "선배님들 보면... 힘들어 보이세요." 수진이는 몰랐다. 아무것도. 막내만은 편하게 두고 싶었다.

경자는 노트를 무릎 위에 펴놓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나는 공부했어.'

12년 동안 슈퍼마켓에서 바코드만 찍던 손가락이, 이제는 LTV, DTI, 전세가율, 갭투자를 술술 적어낼 수 있게 됐다. 유튜브, 온라인 강의, 부동산 카페, 세미나. 밤마다 새벽까지 공부한 시간들. 그것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터널이 왔다. 어둠이 창을 삼켰다. 유리에 경자의 얼굴이 비쳤다. 화장한 얼굴. 블라우스. 눈빛만은 빛나고 있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논밭 대신 건물. 낮은 건물들이 점점 높아지고, 높아진 건물들이 점점 빼곡해졌다.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내 방송이 흘렀다. "곧 서울역에 도착하겠습니다."

경자는 노트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선반에서 짐을 내렸다. 기차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쉬익.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리고 내렸다.

서울역은 다른 세계였다.

천장이 아득하게 높았고, 유리 지붕을 뚫고 쏟아지는 햇빛이 대리석 바닥 위에 번져 있었다. 사람들이 개미처럼 움직였다.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캐리어 바퀴 굴러가는 소리, 안내 방송이 겹겹이 울리는 소리. 대구역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밀도의 소리였다. 빠르고, 날카롭고, 긴장된 공기. 모두가 어딘가를 향해 서두르고 있었다.

경자는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서 올라가면서 역사 안을 둘러봤다. 양복을 입은 남자들, 큰 쇼핑백을 든 여자들, 배낭을 멘 외국인들. 이 사람들 사이에 검은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대구의 슈퍼마켓 캐셔 한 명이 섞여 있었다. 아무도 경자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경자가 왜 여기 왔는지 몰랐다.

핸드폰을 꺼냈다. 11시 반. 약속까지 두 시간 반. 너무 일찍 왔다.

아침을 거른 배가 신호를 보내왔다. 새벽 5시에 커피 한 잔뿐이었으니까. 역사 3층 푸드코트에서 순대국밥을 시켰다. 만 원. 대구보다 천 원 비쌌다.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았다. 옆 테이블에는 가족이 앉아 있었다. 아이가 돈가스를 자르며 까르르 웃었고, 아빠가 냅킨으로 입을 닦아줬다. 건너편에는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모두 즐거워 보였다. 여유로워 보였다. 경자만 혼자였고, 경자만 가방 안에 통장 사본과 계산기를 넣고 서울에 와 있었다.

국밥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뽀얗고 진한 국물. 한 숟가락 떴다. 뜨거웠다. 그 뜨거움이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에 닿자, 새벽부터 굳어 있던 것이 조금 풀렸다. 순대를 썰어 새우젓에 찍었다. 쫄깃했다. 밥을 말아 먹었다. 국물을 머금은 밥알이 고소했다.

한 그릇을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몸은 따뜻해졌는데, 마음은 여전히 쓸쓸했다. 이 큰 서울에서 경자 편은 아무도 없었다. 남편도, 아들들도, 여기 없었다. 경자가 선택한 일이었다. 혼자 오기로 한 것도, 혼자 결정하기로 한 것도.

'괜찮아. 원래 혼자 해왔잖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울렛을 천천히 걸었다. 시간을 보내야 했다. 블라우스 매장에 들어가 천을 만져봤다. 부드러웠다. 가격표를 봤다. 15만 원. 손이 멈췄다. 내려놓았다. 화장품 코너에서 립스틱을 손등에 그어봤다. 붉은 줄 하나가 피부 위에 선명했다. 예뻤다. 하지만 경자는 휴지로 닦아내고 돌아섰다.

'나중에. 다 끝나고 나서.'

지금 이 손이 잡아야 할 것은 립스틱이 아니라 계약서였다. 아직은.

12시 40분. 이제 움직여야 했다. 영등포구청역까지 지하철로 40분.

지하철은 토요일인데도 붐볐다. 1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며 경자는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역 이름이 바뀔 때마다 목적지가 가까워졌고, 가까워질수록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영등포구청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역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얼굴에 부딪쳤다. 늦가을 햇살. 따뜻하면서도 바람은 날카로웠다.

1시 반. 약속보다 30분 일찍.

조영달이 보낸 위치를 확인했다. 오피스텔 근처 스타벅스. 여기서 도보 7분. 천천히 걸었다.

큰 도로를 따라 걷는데 생각보다 훨씬 번화했다. 도로 양옆으로 편의점, 음식점, 카페, 은행, 약국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대형 약국 옆에 깨끗한 빵집이 있었고, 그 옆에 세탁소, 그 옆에 소아과. 한 블록 안에 생활에 필요한 것이 다 있었다. 높은 오피스텔이 여러 동 서 있었고, 조금 멀리 대단지 아파트 단지도 보였다. 10동은 넘어 보이는 규모. 유리 외벽들이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여긴 진짜 인프라가 좋네...'

경자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슈퍼마켓에서 12년을 일하며 손님들의 장바구니를 봐온 사람이었다. 어떤 동네가 살기 좋은지, 경자는 감으로 알았다. 여기는 사람이 빠질 동네가 아니었다. 세입자가 끊길 일은 없겠다는 확신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네이버 지도의 파란 점이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200미터. 150미터. 100미터.

그때 오른쪽으로, 유리 외벽의 건물이 나타났다.

경자는 멈춰 섰다.

20층은 넘어 보였다. 오후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유리 외벽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주변 건물들 사이에서도 유독 깨끗하고 세련된 건물. 1층에 편의점, 카페, 부동산 중개소.

'저기... 저 건물 15층에...'

다리가 멈춘 것은 건물이 커서가 아니었다. 저 안에 자신의 미래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것이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진짜였다. 만질 수 있는 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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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가 보였다. 초록 간판.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커피 향과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가 섞여 있었다. 조영달은 아직 없었다. 당연했다. 1시 반이었으니까.

카페라떼를 시키고 창가 2인 테이블에 앉았다. 창밖으로 그 오피스텔이 보였다.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온기가 손바닥으로 번졌다. 한 모금.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노트를 꺼내 다시 펼쳤다. 확인 항목들을 읽었다. 형광펜으로 표시한 부분들. "한강뷰", "15층", "8평", "주임사". 손가락으로 밑줄을 따라가며 하나하나 되새겼다. 잊으면 안 됐다. 설레는 마음에 빠져서 확인을 놓치면, 그건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커피가 식어갔다.

1시 56분. 문이 열렸다.

경자는 고개를 들었다.

회색 재킷에 하늘색 셔츠. 짧게 깎은 반백머리. 단정한 얼굴. 꼿꼿한 자세. 한 손에 검은 가죽 서류 가방. 스타벅스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주변을 한 번 훑는 눈이 빨랐다. 사람을 찾는 눈이 아니라 읽는 눈이었다. 순식간에 경자를 찾았다. 눈이 마주쳤다.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조심스러움에는 계산이 있었다. 너무 급하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걸음.

"혹시... 대구에서 오신 서경자 사모님이십니까?"

공손했다. 확인하는 투. 하지만 이미 확신하고 있는 사람의 말투이기도 했다.

"아, 네! 맞아요."

경자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조영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양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손바닥이 두툼하고 따뜻했다. 악수에 힘이 있었다. 자신감이 있었다. 이 악수를 수백 번 해본 사람의 손이었다.

"벌써 오셨네요. 기다리시느라 힘드셨겠어요."

빙그레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친근했다. 편안했다. 그리고 그 편안함이 프로의 것이라는 걸, 경자는 아직 몰랐다.

"커피 한 잔 더 드실래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요? 잠깐만요."

조영달은 카운터로 가서 주문했다. 직원에게 무언가 말하며 웃었다. 단골처럼 보였다. 이 동네의 주인처럼 편안한 사람. 커피를 받아 들고 돌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서류 가방을 옆에 세워놓았다.

"대구에서 오시느라 힘드셨죠. KTX로 두 시간이면 그래도 가까운 편이긴 한데."

"네, 괜찮았어요."

"오늘 날씨가 집 보기 딱 좋아요. 햇빛 들어오는 거 확인하시기에."

일조량. 경자의 체크리스트에 있던 항목이었다. 경자는 속으로 놀랐다. 마치 이 사람이 노트를 들여다본 것처럼.

"사모님."

조영달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톤이 바뀌었다. 일상 대화에서 비즈니스로. 자연스러웠지만 분명한 전환이었다.

"그 매물이요, 오늘 세입자분이 집에 계세요. 미리 연락해뒀어요."

"아... 감사합니다."

"직장인이신데, 아주 깔끔하게 사시는 분이에요. 보시면 아실 거예요."

잠깐 뜸을 들였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그리고요... 이 매물이 특별한 게 하나 있어요."

"특별하다니요?"

경자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주택임대사업자 매물이에요. 세금 혜택이 꽤 있습니다. 취득세 감면, 종부세 면제..."

조영달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 일부러.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근데 이건 집 보시고 나서 천천히요. 마음에 드셔야 의미가 있으니까."

당근을 보여주고 거둬들이는 솜씨. 경자는 그것이 기술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조영달이 친절하고 신중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혜택이 있다는 말에 귀가 열렸고, '집 보고 나서'라는 말에 더 빨리 보고 싶어졌다. 조영달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경자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조영달이 손목시계를 봤다.

"슬슬 가볼까요? 여기서 1분이면 됩니다."

경자는 컵에 남은 커피를 마셨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달콤함은 사라지고 쓴맛만 남아 있었다.

"가시죠."

조영달이 먼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서자 다시 오후 햇살. 바람은 차가웠지만 빛은 따스했다.

그리고 오른쪽에, 그 건물이 서 있었다.

경자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20층짜리 유리 외벽. 1층 로비가 유리문 너머로 보였다. 깨끗한 대리석 바닥, 높은 천장, 밝은 조명. 관리가 잘 되는 건물이라는 건 밖에서도 알 수 있었다.

조영달이 앞장서 걸었다. 경자는 따라갔다. 유리문 앞에 섰다.

조영달이 문을 열며 돌아봤다. 웃고 있었다.

"들어가시죠, 사모님."

경자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화: 4장 2화 — 15층, 그 집

4장. 조영달과의 만남 1화. 여의도, 그 집

KTX는 대구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렸다.

경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지난 몇 달 동안 빼곡하게 적어온 노트.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부분들, 별표 친 부분들, 접은 페이지들. 모서리는 이미 낡아서 휘어져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쓸었다. 거칠고 두꺼운 질감. 몇 달 동안의 밤들이 이 안에 들어 있었다.

확인할 것들:

한강뷰 실제로 보이는지 역까지 거리 — 도보 시간 주변 편의시설 건물 관리 상태 실내 상태 기존 임차인 정보 관리비, 소음, 일조량

열 가지 항목. 하나도 빠뜨릴 수 없었다. 4천 5백만 원짜리 결정이었으니까. 가진 전부를 걸고, 없는 돈까지 빌려서 하는 결정.

창밖으로 논밭이 빠르게 지나갔다. 갈색 들판, 앙상한 나뭇가지, 멀리 보이는 산. 익숙한 것들이 뒤로 밀려나고 낯선 것들이 다가왔다.

어젯밤 남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냥 보기만 해. 계약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마." 낮았지만 단호한 목소리. 민준이도 말했다. "엄마, 제발 신중하게." 민수도. "선배님들 보면... 힘들어 보이세요." 수진이는 몰랐다. 아무것도. 막내만은 편하게 두고 싶었다.

경자는 노트를 무릎 위에 펴놓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나는 공부했어.'

12년 동안 슈퍼마켓에서 바코드만 찍던 손가락이, 이제는 LTV, DTI, 전세가율, 갭투자를 술술 적어낼 수 있게 됐다. 유튜브, 온라인 강의, 부동산 카페, 세미나. 밤마다 새벽까지 공부한 시간들. 그것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터널이 왔다. 어둠이 창을 삼켰다. 유리에 경자의 얼굴이 비쳤다. 화장한 얼굴. 블라우스. 눈빛만은 빛나고 있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논밭 대신 건물. 낮은 건물들이 점점 높아지고, 높아진 건물들이 점점 빼곡해졌다.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내 방송이 흘렀다. "곧 서울역에 도착하겠습니다."

경자는 노트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선반에서 짐을 내렸다. 기차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쉬익.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리고 내렸다.

서울역은 다른 세계였다.

천장이 아득하게 높았고, 유리 지붕을 뚫고 쏟아지는 햇빛이 대리석 바닥 위에 번져 있었다. 사람들이 개미처럼 움직였다.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캐리어 바퀴 굴러가는 소리, 안내 방송이 겹겹이 울리는 소리. 대구역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밀도의 소리였다. 빠르고, 날카롭고, 긴장된 공기. 모두가 어딘가를 향해 서두르고 있었다.

경자는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서 올라가면서 역사 안을 둘러봤다. 양복을 입은 남자들, 큰 쇼핑백을 든 여자들, 배낭을 멘 외국인들. 이 사람들 사이에 검은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대구의 슈퍼마켓 캐셔 한 명이 섞여 있었다. 아무도 경자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경자가 왜 여기 왔는지 몰랐다.

핸드폰을 꺼냈다. 11시 반. 약속까지 두 시간 반. 너무 일찍 왔다.

아침을 거른 배가 신호를 보내왔다. 새벽 5시에 커피 한 잔뿐이었으니까. 역사 3층 푸드코트에서 순대국밥을 시켰다. 만 원. 대구보다 천 원 비쌌다.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았다. 옆 테이블에는 가족이 앉아 있었다. 아이가 돈가스를 자르며 까르르 웃었고, 아빠가 냅킨으로 입을 닦아줬다. 건너편에는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모두 즐거워 보였다. 여유로워 보였다. 경자만 혼자였고, 경자만 가방 안에 통장 사본과 계산기를 넣고 서울에 와 있었다.

국밥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뽀얗고 진한 국물. 한 숟가락 떴다. 뜨거웠다. 그 뜨거움이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에 닿자, 새벽부터 굳어 있던 것이 조금 풀렸다. 순대를 썰어 새우젓에 찍었다. 쫄깃했다. 밥을 말아 먹었다. 국물을 머금은 밥알이 고소했다.

한 그릇을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몸은 따뜻해졌는데, 마음은 여전히 쓸쓸했다. 이 큰 서울에서 경자 편은 아무도 없었다. 남편도, 아들들도, 여기 없었다. 경자가 선택한 일이었다. 혼자 오기로 한 것도, 혼자 결정하기로 한 것도.

'괜찮아. 원래 혼자 해왔잖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울렛을 천천히 걸었다. 시간을 보내야 했다. 블라우스 매장에 들어가 천을 만져봤다. 부드러웠다. 가격표를 봤다. 15만 원. 손이 멈췄다. 내려놓았다. 화장품 코너에서 립스틱을 손등에 그어봤다. 붉은 줄 하나가 피부 위에 선명했다. 예뻤다. 하지만 경자는 휴지로 닦아내고 돌아섰다.

'나중에. 다 끝나고 나서.'

지금 이 손이 잡아야 할 것은 립스틱이 아니라 계약서였다. 아직은.

12시 40분. 이제 움직여야 했다. 영등포구청역까지 지하철로 40분.

지하철은 토요일인데도 붐볐다. 1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며 경자는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역 이름이 바뀔 때마다 목적지가 가까워졌고, 가까워질수록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영등포구청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역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얼굴에 부딪쳤다. 늦가을 햇살. 따뜻하면서도 바람은 날카로웠다.

1시 반. 약속보다 30분 일찍.

조영달이 보낸 위치를 확인했다. 오피스텔 근처 스타벅스. 여기서 도보 7분. 천천히 걸었다.

큰 도로를 따라 걷는데 생각보다 훨씬 번화했다. 도로 양옆으로 편의점, 음식점, 카페, 은행, 약국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대형 약국 옆에 깨끗한 빵집이 있었고, 그 옆에 세탁소, 그 옆에 소아과. 한 블록 안에 생활에 필요한 것이 다 있었다. 높은 오피스텔이 여러 동 서 있었고, 조금 멀리 대단지 아파트 단지도 보였다. 10동은 넘어 보이는 규모. 유리 외벽들이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여긴 진짜 인프라가 좋네...'

경자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슈퍼마켓에서 12년을 일하며 손님들의 장바구니를 봐온 사람이었다. 어떤 동네가 살기 좋은지, 경자는 감으로 알았다. 여기는 사람이 빠질 동네가 아니었다. 세입자가 끊길 일은 없겠다는 확신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네이버 지도의 파란 점이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200미터. 150미터. 100미터.

그때 오른쪽으로, 유리 외벽의 건물이 나타났다.

경자는 멈춰 섰다.

20층은 넘어 보였다. 오후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유리 외벽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주변 건물들 사이에서도 유독 깨끗하고 세련된 건물. 1층에 편의점, 카페, 부동산 중개소.

'저기... 저 건물 15층에...'

다리가 멈춘 것은 건물이 커서가 아니었다. 저 안에 자신의 미래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것이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진짜였다.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스타벅스가 보였다. 초록 간판.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커피 향과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가 섞여 있었다. 조영달은 아직 없었다. 당연했다. 1시 반이었으니까.

카페라떼를 시키고 창가 2인 테이블에 앉았다. 창밖으로 그 오피스텔이 보였다.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온기가 손바닥으로 번졌다. 한 모금.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노트를 꺼내 다시 펼쳤다. 확인 항목들을 읽었다. 형광펜으로 표시한 부분들. "한강뷰", "15층", "8평", "주임사". 손가락으로 밑줄을 따라가며 하나하나 되새겼다. 잊으면 안 됐다. 설레는 마음에 빠져서 확인을 놓치면, 그건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커피가 식어갔다.

1시 56분. 문이 열렸다.

경자는 고개를 들었다.

회색 재킷에 하늘색 셔츠. 짧게 깎은 반백머리. 단정한 얼굴. 꼿꼿한 자세. 한 손에 검은 가죽 서류 가방. 스타벅스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주변을 한 번 훑는 눈이 빨랐다. 사람을 찾는 눈이 아니라 읽는 눈이었다. 순식간에 경자를 찾았다. 눈이 마주쳤다.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조심스러움에는 계산이 있었다. 너무 급하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걸음.

"혹시... 대구에서 오신 서경자 사모님이십니까?"

공손했다. 확인하는 투. 하지만 이미 확신하고 있는 사람의 말투이기도 했다.

"아, 네! 맞아요."

경자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조영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양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손바닥이 두툼하고 따뜻했다. 악수에 힘이 있었다. 자신감이 있었다. 이 악수를 수백 번 해본 사람의 손이었다.

"벌써 오셨네요. 기다리시느라 힘드셨겠어요."

빙그레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친근했다. 편안했다. 그리고 그 편안함이 프로의 것이라는 걸, 경자는 아직 몰랐다.

"커피 한 잔 더 드실래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요? 잠깐만요."

조영달은 카운터로 가서 주문했다. 직원에게 무언가 말하며 웃었다. 단골처럼 보였다. 이 동네의 주인처럼 편안한 사람. 커피를 받아 들고 돌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서류 가방을 옆에 세워놓았다.

"대구에서 오시느라 힘드셨죠. KTX로 두 시간이면 그래도 가까운 편이긴 한데."

"네, 괜찮았어요."

"오늘 날씨가 집 보기 딱 좋아요. 햇빛 들어오는 거 확인하시기에."

일조량. 경자의 체크리스트에 있던 항목이었다. 경자는 속으로 놀랐다. 마치 이 사람이 노트를 들여다본 것처럼.

"사모님."

조영달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톤이 바뀌었다. 일상 대화에서 비즈니스로. 자연스러웠지만 분명한 전환이었다.

"그 매물이요, 오늘 세입자분이 집에 계세요. 미리 연락해뒀어요."

"아... 감사합니다."

"직장인이신데, 아주 깔끔하게 사시는 분이에요. 보시면 아실 거예요."

잠깐 뜸을 들였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그리고요... 이 매물이 특별한 게 하나 있어요."

"특별하다니요?"

경자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주택임대사업자 매물이에요. 세금 혜택이 꽤 있습니다. 취득세 감면, 종부세 면제..."

조영달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 일부러.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근데 이건 집 보시고 나서 천천히요. 마음에 드셔야 의미가 있으니까."

당근을 보여주고 거둬들이는 솜씨. 경자는 그것이 기술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조영달이 친절하고 신중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혜택이 있다는 말에 귀가 열렸고, '집 보고 나서'라는 말에 더 빨리 보고 싶어졌다. 조영달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경자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조영달이 손목시계를 봤다.

"슬슬 가볼까요? 여기서 1분이면 됩니다."

경자는 컵에 남은 커피를 마셨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달콤함은 사라지고 쓴맛만 남아 있었다.

"가시죠."

조영달이 먼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서자 다시 오후 햇살. 바람은 차가웠지만 빛은 따스했다.

그리고 오른쪽에, 그 건물이 서 있었다.

경자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20층짜리 유리 외벽. 1층 로비가 유리문 너머로 보였다. 깨끗한 대리석 바닥, 높은 천장, 밝은 조명. 관리가 잘 되는 건물이라는 건 밖에서도 알 수 있었다.

조영달이 앞장서 걸었다. 경자는 따라갔다. 유리문 앞에 섰다.

조영달이 문을 열며 돌아봤다. 웃고 있었다.

"들어가시죠, 사모님."

경자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화: 4장 2화 — 15층, 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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