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장: 혼자 돌아가는 밤기차
서울역 플랫폼에 바람이 불었다. 11월 끝자락의 바람. 코트 사이로 파고드는 칼바람. 저녁 6시 반, 하늘은 이미 어두웠고 플랫폼 위 형광등만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플랫폼 끝 전광판에 빨간 글씨가 떴다. '대구행 KTX 158 — 18:40 — 3분 후 도착'. 빨간 글자가 어둠 속에서 깜빡였다.
경자는 코트 깃을 세우며 플랫폼 가장자리에 섰다. 가방 손잡이를 꽉 쥐었다. 무거웠다. 아침에 나올 때보다 훨씬. 매물 설명서, 조영달의 명함, 빼곡히 적은 노트. 오늘 하루가 통째로 이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주말 저녁 귀성길이라 플랫폼이 북적였다. 큰 캐리어를 끈 여행객들, 아이 손을 잡고 뛰어가는 젊은 부부, 어깨를 기댄 채 웃고 있는 연인. 모두가 누군가와 함께였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누군가에게 기대어.
경자만 혼자였다. 아침에 대구를 떠날 때도, 15층 창문 앞에 서서 한강을 볼 때도.
'남편한테 뭐라고 말하지...'
조영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언제든 팔 수 있어요.' '세금 혜택이 있어요.' '제가 다 도와드릴게요.' 달콤한 말들. 하지만 그 사이사이로 다른 단어들이 끼어들었다. 주임사. 5%. 10년. 달콤함 틈새로 차갑게 스며드는 것들.
"대구행 KTX 158열차가 곧 들어오겠습니다."
안내방송이 울렸다. 멀리서 불빛 하나가 어둠을 뚫고 다가왔다. 레일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바닥으로 느껴질 만큼. 쉬이이익.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긴 열차가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왔다. 열차가 밀어낸 바람에 머리카락이 얼굴을 때렸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물결에 떠밀리듯 올라탔다. 기차 안의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히터 냄새. 새 카펫 냄새와 뒤섞인, 기차 특유의 따뜻하고 텁텁한 공기.
12호차. 창가 자리. 일부러 골랐다. 혼자 가는 길이니까.
가방을 선반에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창밖 플랫폼에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손을 흔드는 사람. 포옹하는 연인.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는 아빠. 경자는 고개를 돌렸다. 창에 비친 자기 얼굴만 봤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플랫폼이 뒤로 밀려나고, 서울역의 거대한 유리 천장이 스쳐 지나가고, 기차는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
창문에 경자의 얼굴이 비쳤다. 아침에 대구에서 출발할 때 터널에서 본 얼굴과 달랐다. 그때는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기대로. 희망으로. 지금은 아니었다. 화장이 번진 눈가. 피로가 내려앉은 입꼬리. 하루 종일 긴장하고, 설레고, 고민한 얼굴이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밤이었다. 창밖으로 서울 외곽의 풍경이 흘러갔다. 주택가의 등불, 고가도로의 헤드라이트, 아파트 단지의 노란 빛. 모든 것이 기차의 속도에 밀려 긴 선이 되어 흘러갔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새 페이지를 펼쳤다. 적어야 했다. 이대로 집에 가면 남편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았다.
펜 끝을 입술에 댔다.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적기 시작했다.
장점: 한강뷰 — 임차인 구하기 쉬움 역세권 — 입지 좋음 깨끗한 상태 — 관리 잘됨 주임사 — 세금 혜택 포괄 매수 — 언제든 팔 수 있음
다섯 줄. 조영달이 말한 것들이었다.
이제 단점이었다.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점: 보증금 부족 — 대출 필요 대출 이자 — 매달 갚아야 함 10년 의무 — 길다 5% 인상 제한 — ?
장점은 다섯 줄, 단점은 네 줄. 하지만 마음은 단점 쪽이 더 무거웠다. 특히 마지막 줄. 5% 옆에 적은 물음표. 조영달은 "별거 아니에요"라고 했다. 손을 흔들며. 파리를 쫓듯이. 하지만 이 물음표가 지워지지 않았다.
'별거 아니겠지. 전세니까.'
창밖으로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서울의 빽빽한 건물들이 사라지고, 어둠 속에 듬성듬성 빛이 흩어졌다. 논밭. 비닐하우스의 등불. 그러다 다시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30층은 넘어 보이는 고층 아파트들. 외벽이 깨끗하고, 조경 조명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저 안에 가족들이 있겠지.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아이들이 숙제를 하고 있겠지.
경자네 집은 대구 봉화동의 단독주택이었다. 20년 전에 들어왔다. 20년이 지났는데 집값은 거의 그대로였다.
'서울에 집이 하나 있으면... 다를 텐데.'
지금 안 하면 언제. 50대 중반에 다음 기회가 올까.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었다. 오늘 찍은 사진들을 넘기다가 멈췄다. 한강 사진이었다. 창문 너머로 찍은, 멀리서 은빛으로 반짝이던 강.
'이게 내 것이 된다면...'
유리에 손을 댔을 때의 차가움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차가움 뒤에서 올라오던 뜨거운 것도.
기차는 계속 달렸다. 밤이 깊어졌다.
객차가 조용해졌다. 건너편 자리의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무릎 위에 아이를 재우고 있었다. 여섯 살쯤 될까. 아이가 엄마 무릎에 얼굴을 묻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여자의 손이 아이의 등을 느리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손. 경자도 그랬다. 애들이 어렸을 때. 민준이, 민수, 수진이. 셋 다 그렇게 재웠다.
덜컹. 덜컹. 레일 이음새를 넘을 때마다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경자만 깨어 있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1월의 비. 빗방울이 창을 때렸다. 타다닥. 타다닥. 기차의 속도에 밀려 빗줄기가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바깥 풍경이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번져 보였다.
빗방울 사이로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에 이불 속에서 "조심해서 다녀와"라고 했다. 돌아눕더니 다시 잠들었다. "잘 보고 와"도, "전화해"도 아니었다. 반대하고 싶었지만 반대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
'여보... 나 좋은 집 봤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좋았어"라고 하면 남편은 뭐라고 할까. 한숨을 쉴까. 아무 말 없이 TV만 볼까. 등을 돌리고 누울까.
'보고 와서 신중하게 결정해.'
아침에 남편이 한 말이었다. 신중하게. 하지만 경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미 결정했다는 것을. 15층 창문 앞에서, 한강을 보는 순간 결정했다는 것을.
비가 더 세게 내렸다. 타다다다닥. 유리 위로 물줄기가 갈라지며 흘렀다. 경자는 이마를 창에 기댔다. 차가웠다. 15층 창문의 유리와 같은 차가움이었다. 하지만 저건 한강이 보이는 유리였고, 이건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유리였다.
"동대구역에 곧 도착하겠습니다."
안내방송에 눈을 떴다. 잠든 건 아니었다. 깜빡한 것이었다. 비가 그쳐 있었다. 창문에 물방울 자국만 남아 있었다.
건너편의 아이 엄마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다 왔어,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
기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동대구역의 조명이 보였다. 아침에 떠날 때와 같은 역인데, 돌아오는 기분은 전혀 달랐다.
쉬이이익.
문이 열렸다. 밤공기가 얼굴에 부딪쳤다. 대구의 11월 밤은 건조하고 매서웠다.
택시를 탔다.
"봉화동이요."
익숙한 거리가 스쳐 지나갔다. 동대구역 앞 큰 대로, 깜빡이는 신호등, 봉화동으로 들어서는 좁은 골목. 20년을 산 동네. 아침에 이 길을 나갈 때는 가슴이 뛰었다. 지금은 무거웠다. 같은 길인데.
골목이 좁아졌다. 가로등이 듬성듬성했다. 전봇대에 '부동산 매매 문의'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반쯤 떨어져 나간 스티커. 경자의 눈이 거기에 잠깐 머물렀다.
택시가 단독주택 앞에 섰다. 7천 5백 원. 만 원을 건넸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었다.
택시에서 내려 집을 올려다봤다.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외벽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아침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오피스텔의 깨끗한 유리 외벽을 보고 온 눈에는, 우리 집이 더 낡아 보였다.
대문을 열었다. 삐걱. 경첩에 기름을 쳐야 한다고 남편이 몇 번 말했다. 마당을 가로질렀다. 비에 젖은 빨래가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현관문 앞에 섰다. 가방을 내려놓았다. 열쇠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오늘 하루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갔다. 새벽에 눈이 떠진 것. 서울역의 높은 천장. 순대국밥의 뜨거운 국물. 엘리베이터의 빨간 숫자. 15층. 1505호. 한강. 유리에 닿은 손. 조영달의 웃음. 5%. 명함. 서류.
그리고 지금, 대구 봉화동의 단독주택 현관 앞에 서 있다. 외벽 페인트가 벗겨진 집. 비에 젖은 빨래가 걸린 마당.
'어떻게 말하지.'
심호흡. 한 번. 두 번.
열쇠를 넣었다. 돌렸다. 찰칵.
문이 열렸다.
다음 화: 4장 5화 — 집으로 돌아온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