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진정시키는 것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파리의 흐릿한 아침 빛이 방 안을 옅은 회색으로 물들이기도 전에, 머릿속에서는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줄줄이 번호표를 뽑고 서 있다. 이 일을 끝내면 저 일, 저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쓰고, 불어 공부를 하고, 피아노를 연습하고.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 아니라 서른여섯 시간이어도 부족할 것 같은 날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서게 되었다.
양치를 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든 것뿐이었는데, 거울 속의 내가 낯설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깊어져 있었다. 볼 위로 검은 기미들이 올라와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 언제 생겼지?" 혼잣말이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또 다른 목소리가 따라왔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할 일이 쌓였어. 얼굴은 내버려둬."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랫동안 따뜻한 물 아래 서서 샤워를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가끔은 직접 만든 마사지 팩을 얼굴에 골고루 바르며, 피부 위를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어루만지던 시간도 있었다.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며 "오늘 피부 좋다" 하고 스스로에게 칭찬을 건네던 여유. 그런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의 나는 거울을 보면 고개를 돌린다. 안 보면 되지 뭐. 그렇게 나를 외면하고 다음 할 일로 달려간다.
그러다 어느 밤, 모든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왜 이렇게 수박 겉핥기처럼 모든 것을 스쳐가고 있는 걸까. 차분히 앉아서 깊이 생각하고,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오늘 하루를 되새기는 시간. 그런 시간이 필요한데, 나는 그걸 사치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나에게 진정하라고 말해줘.'
그 밤, 마음속에서 올라온 문장이었다.
나를 진정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이 울적할 때, 그리운 사람을 몹시도 보고 싶을 때, 나라는 존재가 인정받지 못한 것 같은 수치와 외로움이 밀려올 때. 벌여놓은 일들 사이에서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반대로, 살아있음에 기쁨과 감사가 차오를 때. 이 모든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걷는다.
파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오디오북을 들으며 공원을 거니는 것이다.
뱅산느 숲으로 들어서면, 도시의 소음이 한 겹씩 벗겨진다. 자갈 깔린 산책로를 밟는 발소리,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 귓속에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인생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하고, 눈앞에서는 세상이 저마다의 색깔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초록과 노랑, 점박이처럼 빨간 반점이 번진 커다란 나무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빛의 조각을 흩뿌린다. 그 아래를 지나면 호수가 나온다. 수면 위로 하얀 백조 한 쌍이 미끄러지듯 유영하고 있다. 목을 길게 빼고 우아하게 물살을 가르는 그 모습은, 마치 세상의 번잡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고요하다.
백조 옆으로는 오리 떼가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뒤뚱뒤뚱 물가를 서성인다. 거위들은 무리 지어 풀밭 위를 느릿느릿 걸으며, 제 세상인 양 당당하다. 이 생명들은 각자의 리듬으로 살아가고,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며, 같은 공간에서 조화롭게 공존한다.
나는 걸으며 그들을 본다. 그들을 보면서, 어느새 내 마음이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때로는 영화를 본다.
마음이 시끄러워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밤, 나는 화면 속 세상으로 들어간다. 잔잔하면서도 파워풀한 액션이 넘치는 영화를 볼 때, 답답하게 눌려 있던 가슴속 무언가가 대신 터져 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주인공이 주먹을 휘두를 때 내 안의 억울함도 함께 날아간다. 반대로 풍경이 아름답고 인간미가 따뜻하게 스며든 영화를 만나면, 눈물이 나도록 위로받는다. 영화 속 인물의 한마디에 내 삶에 대한 정답 같은 것을 얻기도 한다. 물론 그 정답은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흐릿해지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좀 더 견딜 만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읽는다.
마음의 소음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은 책을 찾아 펼친다.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보다 더 거친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고, 그 사람도 결국 괜찮아졌다는 이야기가 나를 붙잡아 준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서 조금씩 마음이 정돈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사람마다 흔들리는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은 다를 것이다.
생김새가 다르듯, 자라온 환경이 다르듯, 성품도, 취향도, 추구하는 인생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일기를 쓰며 감정을 정리하고, 누군가는 땀이 흠뻑 날 때까지 뛰며 몸 안의 긴장을 풀어낸다. 누군가는 음악 한 곡에 온종일 쌓인 피로를 내려놓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깊은 호흡 속에서 자신의 중심을 되찾는다. 방법은 모두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모두 흔들린다는 것. 희노애락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것.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린 후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파리의 공원을 걷는 것이고, 영화 한 편의 위로이고, 책 한 권의 온기이다.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좋다. 나를 진정시키는 것들은 대개 아주 작고 조용한 것들이다.
50대에 알게 된 것이 있다. 나를 돌보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 오래된 진실을 이제야, 비로소,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다.
파리의 저녁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오늘 밤은, 거울 앞에 좀 더 오래 서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