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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늦어도 괜찮다.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루브르 박물관 근처 우체국에서 열린 스트리트 아트 전시회

by Selly 정

우체국이 갤러리로 변신하다

초겨울 파리의 아침,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는 순간에도 가슴속엔 묘한 설렘이 일렁였다. 딸과 함께 루브르 박물관 근처 우체국에서 열린다는 전시회 소식을 듣고, 마치 보물지도라도 손에 쥔 듯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우체국'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이라곤 고작 갈색 종이봉투와 번호표뿐이었는데, 그곳에서 스트리트 아트 전시회가 열린다니.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진 비밀의 문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메트로 1번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파리의 풍경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였다. 코트 깃을 세우고 목도리를 단단히 여민 채,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메트로역 계단을 올라서자 눈앞에 펼쳐진 건물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우체국이 맞긴 한 걸까?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감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갤러리와 부티크가 사랑에 빠져 탄생한 듯한 이 공간은, 한국의 소박한 우체국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높은 천장 아래로 쏟아지는 햇살, 정갈하게 진열된 엽서들, 손끝에 닿을 듯 말 듯한 곳에 매달린 작은 수첩들. 빈티지한 핸드폰 액세서리들은 마치 시간여행자의 선물처럼 반짝였다. 기념품샵처럼 꾸며진 내부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불어가 물처럼 흘러다녔다.

이곳은 단순히 편지를 보내는 공간이 아니었다. 예술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춤추는, 파리만이 가능한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자, 벽면 가득 펼쳐진 입체적인 세계가 숨을 멎게 했다. 평범한 수채화나 유채화가 아니었다. 종이를 오려 붙이고, 찢고, 겹쳐 쌓아 올린 작품들은 살아 숨 쉬는 듯 생동감 넘쳤다.

한 작품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층층이 쌓인 종이 조각들이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이 작은 우주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속삭이듯 들려주었다. 가격표가 붙어 있었지만, 숫자를 보는 순간 살짝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손에 닿지 않는 별처럼 아득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눈으로 담고, 마음에 새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웠다. 작품 하나하나 앞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며, 그 안에 담긴 감정과 메시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디테일 속에 숨겨진 작가의 숨결이 느껴질 때마다,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다섯 명의 아티스트가 들려주는 이야기

전시장엔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아티스트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처럼, 저마다의 음색으로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 디 보나(Jo Di Bona)*의 작품 앞에 서자 대담한 색채가 눈을 사로잡았다. 붉은색과 파란색이 충돌하듯 어우러진 캔버스 위에서, 현대인의 고독이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사회적 소외감을 다룬 그의 작품은 관람객의 가슴에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아르디프(Ardif)*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화 같았다. 기하학적 선들이 얽히고설킨 사이로,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릿하게 번졌다. 차갑고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한 그의 작품은, 기술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현대인의 모습을 닮았다.


*아스트로(Astro)*의 벽면엔 도시 한복판을 뛰어다니는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가득했다. 그래피티 특유의 자유로움이 물결치듯 흘러넘쳤다. 복잡하게 얽힌 도시 생활 속에서도 자신만의 리듬을 잃지 않으려는 개인들의 몸부림이 느껴졌다.


*칼데아(Kaldéa)*의 작품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외침이었다. 사회적 불평등, 인권 문제를 다룬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바로 그래서 더 깊이 마음에 새겨졌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를 건네는 작품이었다.


*제롬 메스나거(Jérôme Mesnager)*의 흰색 실루엣으로 그려진 인체가 춤추듯 벽을 가로질렀다. 단순한 형태 속에 담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 그의 작품 앞에 서자, 내 그림자마저 예술작품의 일부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토록 다채로운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 전시회는, 현대 도시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전시장 한편에서 특별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작가들이 직접 현장에서 작품을 창작하며 관람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불어가 빠르게 오가는 가운데, 그들의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붓이 캔버스를 스치는 소리, 스프레이 페인트가 벽에 닿는 쉬익 소리가 어우러져 하나의 교향곡을 만들어냈다.

대화에 끼어들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작가들의 눈빛엔 열정이 타올랐고, 손끝에선 창조의 기쁨이 넘쳐흘렀다. 예술은 완성된 작품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창작의 과정 자체가, 그리고 그 과정을 함께 나누는 순간이 진짜 예술이었다.

떠나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릴 때, 한 화가가 환한 미소로 눈인사를 건넸다. 언어는 달랐지만, 그 순간 우린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예술이라는 보편적 언어로.


파리의 밤, 그리고 새로운 시작

전시장을 나서니 어느새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창밖을 바라보니, 파리가 황금빛 불빛을 켜고 있었다. 센강을 따라 늘어선 가로등이 진주목걸이처럼 반짝였고, 건물마다 켜진 불빛들은 마치 도시 전체가 무대 위에 선 듯 아름다웠다.

오늘 하루는 단순히 전시회를 관람한 날이 아니었다. 예술과 일상이 숨 쉬는 도시, 파리의 심장박동을 온몸으로 느낀 날이었다. 우체국이 갤러리가 되고, 벽이 캔버스가 되며, 거리가 무대가 되는 이곳. 50대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꿈을 좇아 이 도시에 온 게 결코 무모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파리의 야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다짐했다. 이 도시에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그 순간들을 글로 엮어 언젠가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겠다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꿈을 향한 여정에 늦은 시간이란 없다는 것을.

딸과 나란히 버스 좌석에 앉아 집으로 향하는 길. 가슴속엔 따스한 여운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오늘 본 스트리트 아트 작품들처럼, 내 삶도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완성이지만 아름답고, 거칠지만 생동감 넘치는 그런 작품으로.

파리의 밤은 깊어가고, 나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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