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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교사의 튀니지 이야기13

튀니지 한인 커뮤니티와의 만남

by Selly 정

"엄마, 나 튀니지로 가고 싶어요!"

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2학년으로 올라갈 딸이 또다시 새로운 나라로 가겠다니.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 학업은 어떡하고? 적응은 할 수 있겠어?"

딸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엄마. 영어로 된 교과서가 나는 더 편해요. 외국 교육 시스템이 나한테 잘 맞아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해외 생활을 했던 딸. 이미 세 번이나 한국과 외국을 오갔다. 한국 학교에서도 더는 받아주기 힘들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미국에 있는 두 오빠와 북아프리카에서 살다 말타를 거쳐 튀니지로 간 지인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엄마!, 동생이 원한다면 가보는 게 어때요?"

미국에 있는 두 오빠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동생이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랐으니 외국 문화나 시스템이 더 잘 맞을 수 있어요."

지인의 조언은 더욱 구체적이었다. "튀니지는 살기 좋은 곳이에요. 물가도 비싸지 않고, 사람들도 친절해요. 프랑스 식민지였던 영향으로 유럽적인 마인드도 있어요. 다만 불어와 아랍어를 사용하니 언어적인 준비가 필요할 거예요. 제 아이들도 잘 적응하고 있어요. 한국인 교민들도 대부분 친절하답니다."

한 달, 두 달... 고민을 거듭한 끝에 우리는 튀니지행을 결정했다. 2016년 2월, 설렘과 불안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튀니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한인 커뮤니티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지인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을 임대하게 되었다. 지인은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갈 계획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사를 도와줄 업체도 소개받아 순조롭게 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첫 주에 우리는 한인 교회를 찾았다.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예배 후 함께 나눈 식사 시간에 자연스럽게 딸의 교육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이 국제학교가 좋을 거예요. 프랑스와 연계되어 있어 졸업하면 프랑스 대학 진학도 가능해요." 한 교민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학교를 방문했다.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학교 방문이 이루어졌다. 교장 선생님과의 면담은 불어로 진행되었지만, 다행히 오랫동안 튀니지에 살았던 선교사님의 통역 덕분에 무사히 입학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프랑스와 연계되어 있어, 졸업하면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과 동등한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튀니지에서의 생활은 예상 외로 풍요롭고 다채로웠다. 지인과 함께 '커다란 시장'이라 불리는 카르푸르에서 장을 보며 튀니지의 물가와 경제 시스템을 배웠다.

어느 날은 수도 투니스에서 조금 떨어진 중앙시장(Marche Central)을 찾았다. 그곳은 어마어마한 생선시장이었다. "와, 이 갈치 좀 봐! 한국보다 훨씬 싸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생선들을 구경했다.

이곳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갈치' 문화였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비늘이 없는 생선을 좋아하지 않아 먹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갈치나 고등어 같은 비늘이 별로 없는 생선을 찾게 되자, 외국인들에게만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싼 가격에 이런 고급 생선을 먹을 수 있다니!" 우리는 2주에 한 번씩 이 시장을 찾아 푸짐하게 생선을 사 왔다. 한국에서는 5,000원이 넘는 갈치 한 마리를 여기서는 1,000원 정도에 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격이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보다는 저렴했다.

메디나 전통시장(souk)을 처음 방문했던 날이 생생히 떠오른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조금 더 걸어가자 눈앞에 광대한 시장이 펼쳐졌다. 마치 한국의 5일장을 보는 듯했다.

"여보, 이거 봐봐!, 정말 우리나라 5일장 같지 않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상점과 길거리 자판대에는 수많은 상품들이 가득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튀니지의 풍부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전통 공예품과 인테리어 소품들을 구경했다.

"와, 저 타피스트리 좀 봐. 색감이 정말 화려하네." 남편이 가리키는 곳에는 화려한 색상의 양모 타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그 옆으로는 청색과 녹색의 세라믹과 도자기, 유리와 돌로 만든 모자이크 작품들이 줄지어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시장을 거닐며 다양한 공예품들을 구경했다. 기하학적 무늬가 특징인 전통 카펫과 러그, 구리와 유리로 만든 등불과 랜턴, 나무로 제작된 전통 악기들... 각각의 물건들이 튀니지의 역사와 문화를 말해주는 듯했다.

"저기 봐, 아라베스크 문양이 정말 정교하네." 나는 나무 조각품에 새겨진 섬세한 문양에 감탄했다. 구리와 은으로 만든 전통 커피 세트, 금속 향로,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전통 바구니 등 다양한 공예품들이 즐비했다.

세라믹 벽걸이 접시, 종이나 캔버스에 그려진 캘리그래피 아트, 올리브 나무로 만든 그릇과 도마, 심지어 튀니지 전통 문의 축소 모델까지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튀니지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여주는 듯했다.

"우리 집에도 이런 걸 좀 들여놓으면 어떨까?" 나는 남편에게 제안했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집을 아름답고 포근하게 가꾸어줄 인테리어 소품들을 골랐다.

지금도 파리 집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불과 커튼은 그때 산 것이다.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네!." 남편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시장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며, 나는 튀니지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다시 한 번 느꼈다. 하지만 이런 적응이 쉽지만은 않았다. 우리 가족만의 힘으로는 튀니지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이번 주말에 한인회 모임이 있어요. 같이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한 교민의 제안으로 우리는 한인회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튀니지의 한인 연합회를 통해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행사는 모든 교민들이 모여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자리였다. 수도 투니스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의 큰 호텔이나 야영장에서 열렸는데, 튀니지 대사를 비롯한 거의 모든 교민들이 참석했다.

"와, 이렇게 많은 한국 분들이 튀니지에 살고 계셨군요!"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인회 모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특히 바닷가 호텔에서 열린 모임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호텔 테라스에 발을 디디는 순간, 코발트빛 지중해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부드러운 미풍이 볼을 스치고, 야자수 잎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하얀 모래사장은 마치 눈부신 비단 같았고, 그 위에 놓인 선베드와 데크체어는 휴양지의 여유로움을 더했다.

" 우리 신혼여행 때가 생각나지 않아?"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 손을 잡고 파도가 깎아놓은 모래 위를 걸으며, 우리는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했다. 그 순간의 낭만은 튀니지에서의 일상 속에서도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다.

뷔페 테이블에 다가가자 튀니지 전통 요리의 향연이 펼쳐졌다. 쿠스쿠스의 고소한 향, 브릭의 바삭한 소리, 샥슈카의 선명한 붉은색이 오감을 자극했다. "와, 이 쿠스쿠스 정말 맛있어요. 튀니지 음식의 다양성에 놀랐다." 라블라비의 부드러운 식감, 오자의 이국적인 맛, 몰로키아의 독특한 향이 입안에서 어우러졌다. 한국어 교사로서 튀니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해질 녘 바닷가를 거닐며, 튀니지에서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주황빛 석양이 물든 바다는 마치 꿈결 같았고, 발아래 모래는 따뜻하게 남아있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튀니지에서의 삶이 얼마나 특별한지 깊이 깨달았다. 이국적인 문화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며 새로운 인생의 장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감사함과 설렘이 피어올랐고,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한인 회장님 댁에서 맛본 숯불 장어는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장어는 처음이에요!" 남편은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한국에서는 비싸서 자주 먹기 힘든 장어를 튀니지에서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교회 야유회나 손님 접대 때도 장어는 빠지지 않는 메뉴였다.

교회생활과 카톡으로 연결된 한인 커뮤니티는 낯선 땅에서의 적응을 도와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한국어 교사, 태권도 사범, 아랍어를 배우러 온 유학생들까지, 다양한 한인들과 교류하며 서로 도왔다.

"선생님, 이 단어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요?" 근처에 사는 한국어 교사와 나는 종종 수업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유학생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해주는 일도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1년에서 3년 정도 공부하다 돌아갔다.

우리 가족은 방 4개, 화장실 3개짜리 넓은 대리석 아파트에 살면서 주 2회 청소 도우미의 도움을 받는 호사를 누렸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나는 종종 이런 생활에 감사함을 느꼈다.

지인의 차를 타고 튀니지의 아름다운 곳곳을 둘러보는 여행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저기 봐, 저 절벽 위의 푸른 마을!" 시디부사이드의 절경에 우리 가족은 탄성을 질렀다. 집 근처에 있는 한국의 사우나 같은 곳도 자주 이용하며 한국 생활이 그립지 않게 지냈다.


2019년 파리로 이사할 때까지의 4년 6개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풍요롭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친절한 지인들과 튀니지 교민들의 도움으로 풍성한 삶을 누렸다.

지금도 튀니지의 맑은 하늘, 푸른 바다,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이 그립다. 특히 저렴하게 즐겼던 신선한 해산물의 맛이 생각난다. 파리의 높은 물가로 인해 이런 호사를 누리기 어려워졌다.

튀니지에서의 삶은 우리 가족에게 깊은 의미가 있었다. 낯선 문화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가족의 유대감도 깊어졌다. 한인 커뮤니티의 따뜻한 정을 통해 어디서든 '집'을 만들 수 있다는 교훈도 얻었다.

파리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지 벌써 4년이 되어간다. 파리 아파트에서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때로는 파리의 분주한 일상 속에서 튀니지의 여유로움이 그리워진다.

튀니지에서 배운 적응력과 개방성은 파리에서 새로운 기회와 도전을 찾아갈 수 있는 자신감을 주었다. 비록 환경은 달라졌지만, 튀니지에서 얻은 삶의 지혜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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