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피어난 딸의 용기와 성장
튀니지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어느 날, 17살의 딸이 중학교 3학년의 낯선 교실에 들어섰습니다. 딸의 눈동자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3살, 심지어 4살이나 어린 동생 같은 학생들뿐이었습니다. 마치 키 큰 나무처럼 우뚝 서 있는 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선생님들은 따뜻한 미소로 딸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눈빛에서 이해와 배려가 느껴졌습니다. 딸의 특별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얼마든지 노력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4살, 15살의 중학생들.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지만, 과연 얼마나 공감하고 배려할 수 있을까요? 한류 열풍 덕분에 한국에서 온 '언니'를 반갑게 맞아줄 거라 기대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랬습니다. 그들이 동경하는 나라,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한국 배우와 K-pop 가수들의 나라에서 온 학생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언어와 나이의 장벽이 높게 솟아있었습니다. 아랍어와 불어가 공용어인 이 나라에서, 우리 딸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5년간의 아랍 국가 생활에도 불구하고, 잦은 이동으로 아랍어 습득이 쉽지 않았습니다. 2년 반 살다가 한국에 갔다 오고, 다시 1년을 살다가 한국에 갔다 오는 식으로 반복되어 안정적으로 아랍어를 배울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왜 아랍어를 모르냐고?" 반 친구들의 질문이 날카롭게 꽂혔습니다. 그들은 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우리 아이는 점점 고립되어 갔습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배려받지 못한 채 학교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때, 한 줄기 희망이 나타났습니다. 혼혈 여학생이었죠. 나이는 딸보다 4살이나 어렸지만 영어로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드디어 친구가 생길 수 있겠구나!"
정성스럽게 포장한 한국 선물을 딸의 손에 쥐어주며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딸의 모습은 여전히 쓸쓸해 보였습니다. 나이 차이와 성격 차이로 인해 그 아이와도 가까워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아이는 튀니지 여학생들과 더 친밀하게 지냈고, 딸이 도움을 요청할 때만 간간이 도와주는 정도였습니다.
학교에서 홀로 걸어 나오는 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친구를 사귈 수 없다면 얼마나 외로울까요? 하지만 이것은 딸이 스스로 극복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다행히 한국 교민 언니, 오빠들의 응원 덕분에 딸은 힘든 시기를 이겨냈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딸의 상황을 잘 아는 교민들이 언제나 응원해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1년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나니, 밝은 새벽이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학급이 형성되었고, 튀니지 학생들도 많이 성숙해졌습니다.
드디어 딸은 튀니지 여학생들과 친구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해외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영어로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해외 생활 경험이 있거나 해외에서 살다 온 학생들이어서 딸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딸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습니다. 대화 속에 친구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고, 저는 그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4개의 방이 있는 넓은 집은 딸의 친구들이 놀거나 자고 가기에 충분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오빠들이 튀니지에 올 것을 대비해 넓은 집을 구했던 것이 오히려 딸의 친구 관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튀니지 여학생들의 방문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함께 웃고 떠들며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엄마로서 얼마나 흐뭇하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딸의 밝아진 모습에 저 역시 안도하고 기뻐했습니다.
특히 튀니지 출신 1명, 오스트리아에서 온 학생 1명, 터키에서 온 1명, 그리고 딸, 이렇게 4명은 단짝 친구가 되었습니다. 튀니지 출신 학생의 부모님은 해외 생활 경험이 많았고, 아버지가 대학 교수여서 한국 학생에 대한 편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딸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도 함께하고, 자신의 딸과 친하게 지내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저 역시 이 가족의 초대로 그 집에 가서 근사하고 맛있는 튀니지 음식을 대접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다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터키에서 온 학생들은 같은 처지여서 빨리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특히 터키 학생의 집이 우리 아파트에서 멀지 않아 더욱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친구는 대학을 위해 각각 터키와 오스트리아로 떠날 때까지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냈습니다. 거의 매일 집에 찾아와서 놀다 가고, 딸도 그 집에 가서 놀다 오는 일이 너무 많아 제가 그만 가라고 할 정도로 빈번하게 오고 갔습니다.
저는 부지런히 한국 음식으로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초대해 한국 문화와 음식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딸이 해외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부모의 적극적인 도움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음식, 한국 물건,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K-pop 가수의 사진들을 선물하며 딸의 친구 만들기와 학교 생활 적응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마단 기간이나 명절에는 딸도 친구들 집에 가서 늦은 저녁을 실컷 먹었고, 한국의 추석이나 설날에는 제가 친구들을 초대해 라면, 김밥, 떡볶이, 떡국 등으로 배불리 대접했습니다. 서로의 문화를 나누며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딸은 이렇게 2년간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튀니지 생활에 점점 즐거워하며 안정되게 정착해가는 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엄마인 저에게 커다란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친구들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튀니지 여학생은 부모의 바람대로 튀니지에서 의대에 입학했고, 오스트리아와 터키 친구들은 고국의 대학으로 돌아갔습니다.
딸은 고3 한 해를 다시 혼자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BAC 시험에 집중하며, 떠난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외롭지 않게 지냈습니다. 서로 대학에 입학해서 자유롭게 만나자는 약속을 하며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BAC 시험에 합격해 프랑스 리옹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딸의 튀니지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그녀는 크게 성장했습니다. "It's always darkest before the dawn(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라는 말처럼,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 밝은 미래를 맞이했습니다.
인생은 계절과 같아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힘든 시기 후에는 반드시 좋은 날이 옵니다. 겨울에는 밤이 길지만, 여름이 오면 낮이 길어지듯이 말입니다.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어려운 시기일수록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힘든 상황에 놓이면 이 어려움이, 이 어둠이, 이 고통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둠은 언젠가는 반드시 걷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도 주구장창 내리지 않는 것처럼, 소나기나 폭우처럼 퍼붓더라도 반드시 그칠 날이 옵니다.
딸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생의 모든 순간이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재의 어려움 앞에서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고 낙담하지 말고 묵묵히 감내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반드시 밝은 태양으로 가득한 행복한 날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