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가 편평한 네모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구 가장자리는 낭떠러지로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먼 곳으로 여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먼 곳으로 여행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다.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지구도 원래는 네모난 모양이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는 사실들 속에서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믿었다.
갇힌 그 공간은 공포가 되었고
반듯하고 각진 생각들은 나를 잡아주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신념이 있다.
특히나 종교적 신념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적이다.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믿는 것이기에
신의 말씀 앞에 타협은 없다.
특히나 나와 같이 융통성이 없고
네모난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더욱 그렇다.
강박의 날을 세우고 죄책감 속에 헤맨다.
나를 지키기 위해 가졌던 신념이
어느 순간 나를 찌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후세계는 천국과 지옥 둘 중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극단적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사실이고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천국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성경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벌을 받고 지옥에 가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남들과 달라야 하니까,
강박적으로 삶의 제약을 걸었다.
타협보다는 신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같은 교회를 다니던 집사님 딸의 얘기를 들었다.
집사님의 딸은 갓난아이부터 교회에 출석했고
유년부를 거쳐 꾸준히 교회생활을 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왕따를 당하더라는 것이다.
이유는 이러했다.
아이가 교회에서 배운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무조건 참고 자기 할 말도 못 해서
무시당하고 왕따를 당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욕도 하면 안 되고
친구를 미워해서도 안되고
친구랑 싸워서도 안된다는
착한 아이콤플렉스에 시달렸으리라.
중학생 된 이후에는
탈모에 시달리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겨우 평범한 학생으로 살 수 있었다.
집사님은 말했다.
아이가 너무 어릴 때 교회생활 하게 한 것이
후회된다고
아이가 느낀 것들을 생활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어른들의 올바른 지도가 있었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대인들도 똑같이 어릴 때부터 성경말씀을
배우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부르타와 같은
토론문화로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세계관을 모나게
만든 것이 신앙심이었다는 사실이 슬프다.
생각의 낭떠러지에서 죄책감을 밀어내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하나의 의문 때문이다.
신을 믿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더 힘들지?
왜 우울증이 오고 공황장애가 오지?
이건 아닌데...
항상 기도도 하고 꾸준히 성경말씀도 봤지만
신앙과 내 삶은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그 죽음의 공포 뒤에는
뭐가 있는 건지 들여다봤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듯
내가 알지 못하는 사후세계는 뭐가 있을까
들여다보았다.
그 끝이 낭떠러지일지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알아야 불안이 끝날 것 같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
물리학에서 말하는 고차원세계등
나의 지구는 둥글다는 걸 증명하듯
하나씩 알아보고 이해해 나갔다.
신기하게도 오히려 마음은 편안해졌고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사후세계는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기보다
오늘 하루를 감사로 살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죽음은 낭떠러지가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성경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2023년을 살고 있다.
지금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신에게 위안을 받고
의지할 수 있어서 좋다.
마음속에 신념이나 법이 있다는 건
자신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법은 살리는 법이어야 한다.
본질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유연해져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지구가 네모라고 믿는 사람이 없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