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매일 독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태산이높다하되 Feb 12. 2023

오늘은 좀 짤지도 몰라!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를 읽고,

지난 12월 말 호주로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준비가 한창일 때 독일에 사는 후배가 유튜브 한 꼭지를 보내주었다. 보면서 내 생각이 나더라나.


드라마, <오늘은 매울지도 몰라>였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인데 난 금시초문인 상태. 한석규를 보다가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20여 년 전엔 일본 소설을 드라마화해 화제가 됐던, <연애시대>에 출연한 감우성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고 하던 후배다.


나는 그 친구에게 영화 <행복>의 헤로인이었던 배우 임수정을 닮았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매우 바람직한 사이다. 말로 하는 칭찬은 전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상대방을 흐뭇하게 한다.


사족. 예전 강남의 어떤 사우나에서 감우성과 한석규를 동시에 본 적이 있다. 친한 정도는 모르겠지만 서로 지인인 듯했다. TMI가 너무 심했나.


그런데 같은 날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책들을 정리하다가 한 책의 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동명의 책이 눈에 띈 것이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음이 분명한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대학원 동창이 아닐까 싶다. 물어봐야지 하면서 해가 넘어갔다.


호주에 입국할 때 내 백팩에는 <오늘은 매울지도 몰라>가 들어있었다. 일년만에 재회한 가족들에게 책 내용을 소개했다. “우리도 책에 소개된 음식을 만들어 먹어볼까?” 그렇게 재미 삼아 그래볼까 했더랬다.


시간은 흐르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하다가 그렇게 책은 잊혀 가던 어느 날이었다.


아내가 식중독에 걸렸다. 치즈가 잔뜩 들어간 도넛을 나와 나누어 먹었는데 아내만 탈이 난 것이다. 상온에서 하루가 지나긴 했어도 별일 없겠지 하고 먹었는데 그만.


정로환을 먹여보고, 약국 약을 사다가 먹였지만도 도무지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몸져누웠다. 아이 둘의 음식과 집안일 모두가 갑자기 내 담당이 된 것이다. 양심상 늘 설거지와 청소는 했어도, 모든 집안일을 내 혼자서 처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버거웠다.


해도 해도 집안일은 끝이 나지 않았다. 늘 찜찜하게 뭔가 남아서 뇌리를 괴롭혔다. 돌아서면 밥을 안쳐야 하고 반찬거리를 다듬어야 했다.


매일 마늘을 찧고 파를 다듬었으며 양파 껍질을 벗겼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ㅎ. 물과 음료수가 남아 있던 컵은 매일 열 개가 넘게 쌓였고 식사 후 설거지 거리는 늘 왜그렇게 늘어만 가는지.


특히 남은 음식물을 처리하는 일은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됐다. 빨래를 돌리면서 널어놓았던 빨래를 거둬들이고 아내와 아들과 딸의 옷들을 개서 날랐다. 이상하게 빨래할 때마다 짝 잃은 양말 한 짝이 남아돈다. 꼭 내 몰골처럼.


아들과 딸을 데리고 장을 보러 다녔다. 로컬 마트와 한인마트 두 군데를 돌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개학을 했다.


첫째야 대학생이니 아침만 챙겨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먹고 다니다가 들어와서 저녁을 먹는데, 둘째는 도시락을 싸줘야 했다. 찐빵이나 도넛, 그리고 방울토마토, 또는 딸기 같은 것들로 런치박스를 채우면 된다. 쉽다. 어려울 것은 없다. 근데 왜 이렇게 지치지….


일찍 일어나 빵을 쪄서 도시락을 싸고 등교하기 전에 먹을 주먹밥을 만들어 우유와 함께 식탁에 올리면 딸이 먹고 간다.


미역국을 주로 끓였다. 마늘을 찧어 넣고 한국에서 후배가 챙겨준 황태포를 넣은 다음, 참치 액젓을 한 스푼, 간장 두 스푼, 그리고 들기름 한 스푼을 넣으면 맛있게 된다. 바글바글 한참을 끓이면 국물 맛이 끝내준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해 줬다. 아내도 아픈 속을 달래는 데 그만이라고 했다.


대패 삼겹살도 구워 먹고, 제육볶음도 했다. 고등어 통조림을 사다가 김치 찜도 해 먹었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에 소개된 나물이나 특식, 또는 협동조합 마트에서 파는 유기농 재료를 사용한 음식처럼 정성을 들이지는 못했다. 따라 할 여유와 시간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결국, 아내를 데리고 동네 보건소에서 써준 소개장을 들고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야 했다. 감염이 심각했던 것이다. 복부와 방광에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입원실에서 이틀을 잤다. 그 사이 아이들은 알아서 먹고 자고 학교에 가고 그랬다.

호주 의료시스템이 합리적이다. GP(동네 보건소)에서 치료가 잘 안되면 의사가 종합병원으로 보내준다. 물론 비용은 국가가 부담한다.

집안일을 하고 간병을 하던 한달 내내, 나는 다윗 왕이 정적에게 쫓기던 시절 자신의 반지에 새겼다는 글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를 속으로 뇌까렸다.


그리고 아내의 입원은 내게 리프레이밍, 즉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가족의 소중함, 다종다양한 집안일을 하며 군말 없이 아이들을 돌보아 온 아내의 노고에 대한 감사와 같은 가치. 행복을 만드는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게 됐다.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선물한 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라 떨궜을 강창래의 눈물을 내가 감히 가늠할 수는 없다.


다만 짐작을 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나 할까. 후배의 유튜브 꼭지, 동기의 책 선물, 그리고 아내에게 들이닥친 고통, 이 일련의 우연이 가져다 준 색다른 경험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도록 해주었다.


<도파민네이션>이라는 책을 쓴 애나 램키라는 정신과 의사는, 쾌락과 고통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이 같다고 했다. 뇌의 같은 영역이 쾌락과 고통의 무게를 시소처럼 균형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스럽던 집안일이 어느덧 익숙해지더니 보람을 느끼게 되자 행복한 일이 되기도 했으니, 책 <도파민네이션> 내용이 생각났으리라.


퇴원한 아내는 거의 회복했지만 내일 둘째의 아침과 도시락은 내가 준비한다. 간장에 멸치를 섞은 주먹밥이 좀 짤지도 모르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인구절벽을 첨단에서 맞이하는 지방 소도시의 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