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니체>, 장재형 저
니체는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로 유명하고 또,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도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학교 화장실마다 기억 나는낙서, “신은 죽었다 -> 그러는 니체도 죽었다”
니체는 평생 편두통을 비롯한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누이, 엘리자베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고. 그는 항상 멋을 부렸다.
외모도 멋지지만 그의 책 제목은 더욱 시대를 앞서갔다. <권력에의 의지>, <즐거운 학문>, <우상의 황혼>, <선악의 저편>, <안티크리스트>, <도덕의 계보>,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비극의 탄생>, <이 사람을 보라> 같은 책 제목을 보게되면 이 시대에도 통할 만큼 세련됐다.
심지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목은 ‘모두를 위한 그리고 아무도 위하지 읺은 책’이라고 달았다. 이 책의 주제는 초인이 되라는 것, 즉 “인간은 자기자신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지, 자신의 한계에 갇힌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는 자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학위도 없던 20대에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될 정도였다니까.
자신감이 넘쳤던덜까? 그의 책,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 사람은 바로 니체 자신이다. 책에는 이런 문장들이 있다고 한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표현이다. 친구들이나 가족들 앞도 아니고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대중 매체에다가 대놓고 이런식으로 대놓고 자랑을 하다니 당시로서는 센세이셔널한 인물일 수밖에.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낙타로 살것인가? 무거운 짐을 지고 하염없이 걷는 낙타의 삶을 사는 수 많은 인간들에게 니체가 하는 질문이다.
아니면 사자로 살 것인가? 사나운 발톱을 앞세워 자기보다 힘이 약한 동물들을 위협하며 또 그 위에 군림하며 살고 싶은가?
아니면 아기의 삶을 살것인가? 모든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며 두려움이나 선입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며 호연지기의 삶을 살것인가.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 낙타는 고통과 패배감에 절어 살다보니 분노와 공포 같은 부정적 감정의 노예가 되기 쉽다. 노예의 자유없는 삶은 원한의 감정을 불러온다고 한다.
사자는 어떤가. 군림은 하지만 고독하다. 먹이사슬에서는 최상위층일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무리에서는 피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정상에서는 내리막 밖에 없지 않은가? 허망함 같은 감정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아기는 어떨까? 아기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그래서 신비롭다. 인간이 멋대로 만든 선악이나 진위의 잣대도 아기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롭다.
맡게 될 책임이나 넘어야 할 장해물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책임과 위험의 경계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아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현명한 삶의 지혜가 아닐까?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한 세기 전으로만 돌아가도 주인과 노예의 경우, 자유라는 개념은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주인의 자유와 노예의 자유는 그 범위와 기준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긴 하다. 돈이 주인이고 사람이 노에가 된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물질만능주의, 자본주의란 말이 결국, 물질과 돈이 주인인 세상이란 뜻 아닌가. 거부하고 벗어나려고 해도 자본은 항상 노동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신성한 노동대신 받아야 하는 임금의 완고함 때문이다. 노동은 유연하고 너그럽지만 임금은 고집스럽게 제한된다. 노동유연화는 그런말이다. 안그래도 너그러운 노동자들에게 더욱 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중세시대 종교재판으로 무고한 약자들이 고통 받을때 과연 하나님과 예수는 누구의 편이었을까?
당시 철학으로 대변되는 학문은 종교의 시녀였다. 이성적 판단이 마비되어 있던 시절을 곱씹어본 니체는 그가 살던 시대에 이미 세상의 선악과 진위를 판단하던 신은 이미 죽고 없다고 말한 것이다.
어제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니체는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극복하는 삶’만이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니체 철학의 요체다.
초인이라는 말은 바로 현재의 나보다 더 나은 나를 의미한다. 니체는 끝없이 이어지는 질병으로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를 평생 괴롭힌 동반자도 연인이 아닌 편두통이었다.
그래도 그는 매일 아침,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며 자신을 바로 세웠다. 니체는 초인이 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생이었다.
우리가 니체처럼 항상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아갈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늘의 나는 어제 한 선택의 산물”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산다면 좀 더 나은 삶으로 한걸음 더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