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가장 저열한 정적 제거 방식
1. 지금으로부터 2156년 전, 로마에서 백색테러가 발생했다.
2.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반도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시작된 로마는 반도의 부족들을 통합해 세력을 넓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해 하나의 국가가 된다. 그리고 지중해 건너 카르타고를 비롯한 주변의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며 제국으로 성장한다.
3. 이 과정에서 로마의 원로원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또한 그들의 자식이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강력한 특권층은 확대 재생산된다. 문제는 그 숫자가 불어나 처음 수십 명에서 시작된 원로원의 숫자가 600여 명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었다.
4. 그라쿠스 형제가 있었다. 귀족 출신으로만 구성되는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해 평민들 중에서 호민관을 선임하는 제도가 도입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라쿠스 형제는 호민관이 되어 기득권을 향해 개혁의 칼날을 빼 든다.
5. 원로원들이 소유한 토지는 광대무변하게 되고 민중들의 삶은 피폐하게 된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그라쿠스 형제다. 이들은 호민관이 되자마자 원로원의 기득권에 대항하는 법률을 입법제안한다. 법률의 골자는 토지와 곡물에 대한 기득권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다. 일명, 셈프로니우스 농지법
6. 외교, 인사, 재정, 사법, 군사 등 모든 권한은 원로원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호민관이었던 그라쿠스 형제들이 제안한 셈프로니우스 법의 핵심은 부정임차 농지를 국가에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원로원이 친인척이나 자신들의 노예 명의(차명)로 불법 소유한 땅을 반환하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법안이었다.
7. 당연히 그라쿠스 형제는 시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게 된다. 농지법인 셈프로니우스 법 외에도 원로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한다. 하지만 원로원의 권한은 여전히 막강한 시절, 당연히 반격이 시작된다. 그라쿠스 형제가 제안한 법률을 무력화시킨다.
8. 로마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는 포기하지 않는다. 임기가 끝나자 재선을 위해 후보에 오른다. 원로원은 계엄령을 발동하고 쇠몽둥이로 그라쿠스 형제를 말 그대로 때려죽인다. 쇠몽둥이는 그라쿠스 형제를 따르던 300여 명의 지지자들까지 살해한다. 백주대낮에 벌어진 일이다.
9. 2010년 성남의 민선 5기 시장이 된 이재명은 모라토리움을 선언한다. 전 시장들이 빚을 너무 많이 내서 토목공사를 벌이며 뒷돈을 받아먹는 등 일을 저지른 바람에 재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거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전 시장들은 모두 구속된 상태.
10. 불필요한 토목공사와 여타 비용을 최소화한 후 여력이 생기면 이재명 시장은 청년 기본소득, 무상교복, 산모지원 등의 자신의 공약이었던 복지정책을 실천한다. 성남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든 그는 탁월한 행정력과 정치력을 인정받아 2018년 경기도지사가 된다.
11. 2년 만에 도 행정을 장악한 이재명 도지사는 각종 루머와 소송에 시달리면서도 경기도를 한국 지방자치학회 전국 지방자치단체 평가 광역도 부문 1위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보편복지, 즉 기본 소득을 강조하며 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이 기본소득 개념은 기득권 층에게 상당한 위협이 된 모양이다.
12.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가적 재난 상황이 발생해 경기가 위축된 문재인 정부 시절, 이재명의 제안으로 전국민에게 똑같이 재난지원금 20만원이 제공된 적있다. 빈부와 좌우,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골고루 지역화폐로 제공되는 지원금에 반대하던 국민들까지 막상 지원금을 받게 되자 호응이 대단했다.
13. 이것은 기본 소득 논쟁의 본격 출발점이 된다. 이재명의 인기가 치솟자 문재인 정부의 주요 실세들은 선별 지원금으로 전환한다.
14.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25만 812표(0.74%) 차이로 석패 - 이 선거에서 무효표가 30만 6천152표였다- 한 이재명은 적극 지지층의 후원으로 정치적 생명을 이어나간다. 인천의 계양을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15. 계속된 검찰의 압수수색과 언론의 비합리적 협박성 보도에도 불구하고 이재명은 민주당의 대표가 된다. 총선을 앞둔 시점, 사법리스크를 떠벌리며 그의 낙마를 바라던 내부의 적들과도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해야 했다.
16. 안팎으로 협잡을 해 공격해도 버티는 강철 멘탈의 이재명은 갑진년 신년 벽두에 결국 물리적 폭력까지 당해야 했다.
17. 목에 칼을 받은 이 대표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칼날을 앞세워 돌격해 목을 찔렀던 괴한은 민주당 당적을 2022년 가을부터니까 1년 반쯤 유지하고 있는 셈인데, 그전엔 5년이 넘는 기간 국민의 힘 당적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섬뜩하다.
18. 느닷없이 이재명의 정적이 된 이낙연은 창당선언을 연기했다. 이쯤 되면 포기도 할만하지만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민주당은 결집할 것이고 국민의 힘은 테러의 여진을 축소시키는 일에 급급할 것이다. 실패한 백색테러의 파장이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른다.
19. 그라쿠스 형제와 그 지지자들이 백색테러를 당한 후 133년이 지난 뒤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상에 등장한다.
20. 원로원의 세가 위축되기 시작한 것은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구축하면서였다. 카이사르의 정치가 발동하면서 귀족들의 부와 권력이 기사계급과 평민들에게 일부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150년 쯤 늦춰진 셈이다.
21. 결국 카이사르도 원로원의 사주를 받은 부르투스에게 칼날을 받고 사망한다. 개혁은 이처럼 힘겹고 또 더디다.
22. 이재명은 살아남았다. 과거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임꺽정 처럼 될 운명일지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개혁의 불쏘시개를 자처한 그의 앞길에 서광이 비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