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물리 강사 이야기
H에게서 전화가 온 때는 점심시간이 막 지나서였다. 놀란 토끼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런 목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그의 상기된 목소리는 생뚱했다. 안 그래도 만날 때마다 그가 내게 들려주는 일상의 해프닝들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지난번 청계산 가면서 내가 얘기했던 물리 선생 있잖아. 그 형님이 내 돈을 빌려갔는데 연락이 안 되네."
"무슨 말이야 이해할 수 있게 차분하게 얘기해야 알아먹지."
그때 내 사무실 탁자 맞은편에는 손님이 한 명 앉아있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내가 전화 하마."
"응?... 응. 그래. 급한 일이니까 빨리 해줘."
H는 입시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원장, H가 운영하고 있는 학원은 이른바 1 학군으로 불리는 강북의 어느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30년 넘게 유지하고 있는 취미와 특기는 술마시는 것이다.
스무 살,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한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거의 하루 걸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잦았다. 술로 시작한 하루는 다음날 오전으로 이어졌고, 집에도 학교에도 나타나지 않는 날도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유전적 요인으로 짐작되는 바, 마침 그는 술이 셌다.
예나 지금이나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그는 8학기만 다니면 되는 대학을 무려 12학기 만에 졸업했다. 그나마도 교수들의 아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1세기가 아직 시작되기 전 사회는 원칙만으로는 굴러가기 어렵던 시절이었으니까.
H가 학교에 다니면서 술 마시는 일 말고 했던 일 가운데 의미 있었던 활동은 연극이었다. H는 분명, 배우로서의 자질이 있었다. 졸업을 하고 방송사 개그맨 시험에 도전했다. 합격했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기강이니 규율이니 선후배 서열이니 하는 그 집단의 꼴 같지 않은 행태'에 적응하기 싫어 곧 그만두었다.
"거기 있다가는 언제든 술을 마시는 게 안 되겠더라고."
그리고 그가 시작한 일이 학원 강사였다. 국문학을 전공한 많은 사람들이 학교나 학원에서 선생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20대부터 시작한 강북의 학원에서 잔뼈가 굵은 H는 결국, 원장이 된다.
그는 술을 마시기 위해 학원을 운영하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맹렬히 술자리를 만들었고 또 술꾼들을 찾아다녔다. 심지어는 강사 시절, 가르치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학부모 항의를 받고 학원에서 쫓겨날뻔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그를 지켰줬다.
그는 요즘에도 수능이 끝난, 갓 스물을 넘긴 제자들과 술자리를 갖는다. 그의 감성이 아직 20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까. 아무튼 H는 학원 원장이나 강사들은 싫어해도 아이들은 좋아하는 강사였다.
학원 강사들 상당수가 술을 마신다. 술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학교가 파하는 시각에 시작하는 학원에서 강의가 모두 끝나는 시간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저녁 내내 목청이 터져라 강의를 하고난 강사들의 컬컬한 목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술밖에 없다.
그들의 지인들은 역시 학원 강사 위주로 형성된다. 약속은 밤늦은 시각이나 주말에 잡는다. 오후부터 시작되는 일상은 그렇게 몸에 배어 H의 삶을 술로 물들였다.
그렇지만 H가 알코올 중독자는 아니다. 하루의 반은 제정신으로 지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는 깨어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말은 함부로 내뱉는 듯 하지만, 맞벌이 부모나 가난한 집의 아이들을 걱정하고 학원에서는 흔치 않은 장학금제도를 마련했으며, 강사들의 급여나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수백 명의 학생들로 바글거리는 학원의 원장까지 된 걸 보면, 뭔가 준비해서 강의를 제대로 한다는 것이다. 대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본 학식도 있어야 하고, 수업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과거 시인 이상과 같은 천재적 문인들 대부분이 술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 문인들과는 둔재들도 함께 했을 것이다. 그러니 H 또한 옛날이었다면, 천재와 둔재 사이 어딘가에서 얼쩡거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으리라.
어지간한 일상을 사는 성인들에 비해 H의, 삶의 질은 오히려 고퀄이다. 북한강에서 팔당을 거쳐 내려오는 한강변에 위치한 그의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팔순이 넘은 부모가 그와 함께 지내고 있다.
세 식구 말고도 세 마리의 유기견이 그의 가족 구성원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님과 유기견들이 그를 데리고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론 그 반대다.
철학자, 칸트는 오후의 어느 특정 시각에 산책을 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 약혼한 여성과 파혼해 버린다. 술과 술친구들을 좋아하는 H는, 주말엔 더욱 맘 놓고 술 마시는 날이다. 그래서 그는 결혼식장까지 예약해놓고는 결국, 파혼했다.
"한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좀 심심하게 사는 게 낫지"
당시 그는 결혼자금으로 무주에 땅을 구입했다. 은퇴하고 유기견들과 함께 그곳에서 지낼 계획이라나.
남들과 다른 길을 태연히 걷고 있는 H에게 내가 전화를 건 것은 그날 저녁시간이었다.
"물리 선생 말이야. 내가 술 사고 밥 사고 단란까지 데리고 가줬는데 말이야. 근데 지난번에 그 양반이 갑자기 돈을 꿔달라더라고."
"얼마나?"
"이천"
"아예 안 갚아?"
"응."
"지금도 너네 학원 강사야?"
"아니, 그만 둔지 한참 됐어.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거는, 그 양반이 내 전화를 안 받아. 아예 차단해버렸나 봐. 그러니까 네가 전화를 해서 얘기를 좀 해줘 봐, 나한테 연락을 좀 하라고."
물리 강사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문자를 남겼다.
"나는 H의 대학 동긴데, H가 당신의 전화를 기다린다. 연락을 주지 않으면 H는 국문과 밴드에 이번 일을 기록해 둘 예정이라고 한다.”
라는 내용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불과 몇 분 뒤 H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물리 강사가 자신에게 전화를 했고 일단, 빌려간 돈의 절반을 당장 보내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물리 강사는 H와의 관계를 가볍게 생각했다. 생각 없이 술이나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H에게 늘 술을 얻어먹었고, 급기야 불요불급하지 않았음에도 돈을 꾸어간 것이다. 그리고 떼어먹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는 H에게 떠도는 학원 강사들 중 한 명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H와 술을 먹다가 우연히 그가 내뱉은 말이 부메랑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그의 아내가 바로 H와 나의 대학 동기생, M이었던 것이다. M 역시 분당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물리 강사에게 보낸 문자의 내용은 그런 사연에 바탕했던 거였다.
물리강사이자 동기 M의 남편으로부터 아직 천만 원을 받아야 하는 H가 다시 내게 연락을 해 온 것은 달포쯤 지난 후였다. 이번엔 물리 강사가 아예 전화번호를 바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원 강사 시절 제출한 이력서에 기록되어 있는 주소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내용증명을 보낸 사람은, 그 서류를 수취한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있다. 며칠 뒤 그 수취인 이름에는, 놀랍게도 S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H가 내게 말했다.
S는 H와 나의 또 다른 여자 동기생의 이름이었고, M의 절친이었다.
내용증명을 보내자, 물리 강사는 H에게 연락을 했고, 나머지 돈을 두세 번에 걸쳐서 갚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제법 걸리긴 했지만 그는 돈을 갚았다.
물리 강사는 명문대 재학 시절, 개인과외를 했다고 한다. 그때, M이 그가 가르치던 학생이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보낸 내용증명을 M의 절친, S가 수취했다. 그는 H에게 M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내용증명을 그의 아내, M이 아닌, 또 다른 대학 동기생이며 M의 절친, S가 받았다는 것이다.
M도 S도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매 학기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한 수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 행사나 학과 행사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새월이 흘러 알게된 동기의 안부에 대한 M의 반응은, 남편인 물리 강사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H에게 말하지 말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덕소에서 H는 유기견들의 아버지로 통하는 사람이고, 아파트에서도 동대표를 할 만큼 지역주민들과 잘 지낸다. 텃밭을 가꾸고 소량의 소출이 나오면 이웃과 나눈다. 그는 막걸리와 맥주를 직접 담그기도 하는 진정한 주당이다. 정작 그는 소주만 마신다.
20년도 더 타던 차량(프라이드 베타)을 최근에 바꿀 정도로 겉 치장에 관심이 없다. 그나마도 운전대를 잡는 날은 일주일에 서너 번이 안된다. 술을 먹기로 작정한 날이나 우연히 먹게 된 날에나 그는 아예 차를 놓고 다닌다. 그 흔한 대리기사도 부르지 않고 집이든 학원이든 어디든 차를 두고 술을 마신 다음날 찾아간다.
H는 물리 강사에게 쓴 술값이나 떼일 뻔한 돈에 대해 푸념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늘 그 사람과 좋았던 때를 떠올리며 그가 왜 그렇게 변한 것인지 속상해 했고, 그와의 인연이 다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물리 강사는 술을 마시면서도 별 얘기가 없었다고 했다. 틈만 나면 여성 접대부가 있는 술집에 가자고 졸랐다는 것이다. 물리강사는 문란한 생활을 일상의 탈출구로 여겼던 사람이었다.
과 수석을 하던 한 동기의 안부를 나와 H는 30년 만에 그것도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H는 물리 강사와 그의 아내, M과 그녀의 절친, S에 얽힌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