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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Dec 20. 2021

父의 政敵이 된 子, 思悼되다!

이덕일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고

이선,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둘째 아들이다. 첫째 효장세자를 잃고 7년이나 흐른 뒤에 본 귀한 자식이었다. 그런데 28세의 나이가 된 이선은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사망한다. 왕이 세자를 엽기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 임오화변(1762년)이다. 아버지 영조가 죽은 아들에게 시호를 내리니 곧 사도(思悼) 세자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표지 앞면

역사학자 한가람 역사연구소의 소장, 이덕일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역사평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학자다. 그가 온갖 서적과 기록을 상고(詳考)해 재구성한 인물, 사도세자에 관한 역사평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세자까지 제거해야 했던 정치의 비정함에 몸서리가 난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정신착란에 시달리던 인물이 아니었다.


임오화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현존하는 가장 보편적 텍스트는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씨가  <한중록>, 그리고 조선의 사관이 기록한 <영조실록>, <정조실록>이다. 여기에 상소문과 당시 사대부들이 남긴 각종 문헌들을   있다.


그런데 사도세자와 관련한 이야기는 혜경궁 홍 씨의 기록, <한중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세간에 알려져 왔다. <한중록>은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적해야 할 것은 정조 생전에 쓴 1편과 정조 사후에 쓴 2~4편의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정조는 사건(임오화변) 당시 열한 살의 어린 나이지만 사건의 진상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 치세에서는 사도세자가 정신병이란 말을 하지 못하다가 사도세자의 정신병 주장은 정조 사후에야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다.(53쪽)"


<한중록>의 내용만으로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이해하기 불가능하다는 저자의 설명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대목이다.


노론과 영조의 운명적 결합

영조가 왕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면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을 알 수 있다.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이 정치의 주류로 활약하던 시대의 왕이다. 첫 번째 부인 인경왕후와 계비 인현왕후 민 씨는 모두 서인가의 여인들이었지만 두 여인 모두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다.

이덕일 박사


이때 장옥정이라는 남인계 역관 장현의 조카가 궁녀로 등장하는데 그녀가 바로 장희빈이다. 인현왕후가 폐서인 되고 장희빈이 중전이 된다. 경신환국(1680년)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이 순식간에 실각하게 되고, 남인이 등용되는 계기가 되니 기사환국(1689년)이다. 서인의 거센 반발을 뚫고 숙종은 장희빈 소생의 아들 윤을 원자로 정호하고, 이를 종묘에 고한다. 서인 영수 송시열(1607~1689)은 원자 정호를 부정하다가 사약을 받는다. 원자 윤이 경종이 된다.


6년 뒤 왕비였던 장옥정이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남인이 실각한다. 갑술환국(1694년)이다.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숙종의 승은을 입은 숙의 최 씨는 비상한 방법으로 왕의 총애를 차지한다. 인현왕후 민 씨에 대한 동정론을 불러일으켜 자신도 부각하면서 민 씨를 중전으로 복위시키는 데 성공한다.


장희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인현왕후의 중전 복위를 주도했던 것이다. 중전으로 복귀한 인현왕후가 죽자 숙의 최 씨로부터 이야기를 듣게 된 숙종은,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의 시기와 질투, 저주 탓으로 여긴다. 숙종은 세자, 윤(경종)의 모친인 희빈에게 사약을 내린다.


숙종 말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한다. 노론은 택군(擇君)의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남인 출신의 세자, 윤(경종)을 제거하고 금(영조)을 차기 대권주자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수를 쓴다. 하지만 소론은 왕위의 정통성에 무게를 둔다. 그리고 남인을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한다. 세자, 윤을 지키기로 한다. 숙종이 노론 강경파 이이명과 독대를 한 후 운명하면서 차기 왕권에 대한 분명한 뜻을 남기지 않는다. 윤은 남인과 소론의 소수파의 지지를 받게 되지만, 노론 대신으로 둘러싸인 조정에서 불안한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영조의 역사 다시 쓰기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불행의 그늘이 드리워지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영조 31년에 발생한 나주 벽서 사건(1775년)이다. 나주 객사에 한 장의 흉 서가 내걸린 것으로 영조의 치세를 전면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소론 강경파 윤지가 범인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노론은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몰아간다. 탕평을 주창하던 영조도 결국 노론의 일파임을 자인하는 계기가 된다. 영조는 자신의 세제 시절 목숨의 은인이었던 소론 온건파 조태구와 유봉휘를 역적으로 규정해버린다. 이 두 대신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경종이 아직 젊은 시절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이 세제가 되는 과정에서 경종 2년 발생한 목호룡의 고변(임인옥사)은 경종과 남인(소론 강경파 포함)의 일대 반격이었다. 노론 4 대신이었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이 경종을 제거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목호룡이 고변한 것이다.


4 대신은 4흉이 되어 사형된다. 당시 수사기록이 <임인옥안>인데, 이 기록에 영조의 이름(이금)이 역적의 수괴로 올라있었던 것이다. 소론 온건파였던 조태구와 유봉휘의 도움으로 세제, 연잉군은 기사회생한다.


영조는 52년의 재위 기간 중 무려 31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4흉이었던 노론 4 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명예회복과 <임인옥안>을 불태워 없애면서 자신의 과거를 옥죄고 있던 모든 족쇄를 풀어버린다. 심지어 자신과 노론 강경파의 행위가 옳았다는 주장을 담은 <천의소감>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한다.


목호룡의 고변과 임인옥안에 따르면 영조와 노론 4 대신은 경종 시절 역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영조의 정통성에는 흠집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조가 진정한 탕평군주가 되고 싶었다면, <천의소감>과 같은 과거사를 왜곡한 서적을 출판할 것이 아니라 모든 당파에 문호를 개방하고 용서와 화해를 청했어야 옳다. 물론, 노론의 동의를 구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러나 영조는 인내와 끈기, 용기와 신념, 그리고 권모술수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영조 개인에게 능력이 있었기에 의지만 있었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사도세자 이선, 소론으로 기울다

세자의 정치적 입장은 부왕 영조의 바람과 달리 소론에 동정적이었다. 사도세자는 윤지의 난으로도 알려진 나주벽서 사건(1775년)과 토역 경과 투서사건(1755년 3월) 등으로 발생한 소론에 대한 노론의 비정상적 공세를 바로잡고 싶었다.


"노론 사간 박치문이 올린 상소는 노론의 정치보복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여인으로 종이 된 자를 제외하고 남자로 종이 된 자는 대조(영조)께 아뢰어 일체 남김없이 진멸해 화근을 끊어버려야 합니다.'(221쪽)"


소론에 동정심을 보인 사도세자는 노론의 정적으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사도세자에게는 변변한 자기 사람 하나 없는 형편이었고, 비극을 더하는 것은 아내 혜경궁 홍 씨마저도 노론 영수였던 장인 홍봉한의 당론을 따르는 정적이었다는 데 있다.


고희를 바라보는 부왕 영조의 유고시, 신변이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던 세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했다. 형수 혜빈 조 씨(효장세자 빈)의 오빠, 소론 조재호와 연대를 꾀하고, 평안감사의 군사적 도움을 받기 위해 20여 일간의 관서행을 감행했던 것이다. 동궁의 마당을 파고 집을 지어 무기와 말을 숨기는 행위를 통해 자구책을 마련하려고 했다는 것이 실록과 당시 문헌을 통해 밝혀졌다고 저자 이덕일 박사는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자구책은 노론의 의해 즉각 역모로 몰릴 소지가 충분했다.


영화, <사도>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비 인원왕후 김 씨, 정성왕후 서 씨, 혜빈 홍 씨,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 씨, 숙의 문 씨 등은 일체 노론의 당론을 따르는 일색이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혜빈 홍 씨의 부친이자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노론 영수인 홍봉한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훗날 정조가 되자마자 홍 씨 일가가 몰락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82세까지 살았던 혜경궁 홍 씨는 임오사화(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는 사건)의 목격자가 모두 사라진 순조 때 가서야 <한중록>을 완성한다. 순조 대에 가면 홍 씨 일가가 복권되는 배경이다.


"영조 33년, 사도세자는 <무기신식>이라는 병서를 집필한다. '우리나라는 좁아서 군사를 쓸 땅이 없다. 하지만 동쪽으로는 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와 접했으며, 서쪽과 남쪽은 바다지만 여기를 건너면 곧 옛날의 중원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 이 병서는 영조시대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북벌(北伐)을 위해서 집필된 책이다.(238쪽)"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표지 뒷면

영조 36년 종기 치료를 위해 온궁행차를 하는 사도세자의 모습은 군주의 모습 그대로다.

"원근에서 구경 오는 백성들이 매우 많은데, 사람과 말이 복잡하게 얽혀서 반드시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서 각별하게 구휼하도록 하고 구경하는 사람을 구타해 쫓지 말며 농토를 상하지 않게 하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지 불과 2년 전의 모습이다.(269쪽)"


효종의 뜻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인물, 이선은 역사의 패배자로 기록된 것으로도 모자라 노론 당파였던 부인에 의해 화병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미치광이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덕일 박사의 책,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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