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경종, 영조)
숙종의 환국 정치로 신하들의 권력이 약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병신(丙申) 처분에서 보듯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됐을 때 숙종은 노론의 손을 들어주었고, 노론의 대표선수 이이명과 독대를 해 끝내 남인과 소론 당색을 띄고 있던 자신의 아들이자 국본인 윤(경종)을 힘없는 왕이 되도록 방조한다. 당연히 경종의 재위는 불안하게 시작된다.
건저 & 대리, 그리고 독살
이제 막 재위에 오른 경종에게 노론 대신,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은 건저, 즉 세자를 세워야 한다며 후사가 아직 없으니 세제로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우라고 주장한다. 경종은 수락한다. 그러자 노론 세력은 아예 대리청정까지 제안하게 되는데, 이때 뜻밖에도 경종은 이미 정승자리을 비롯한 주요 보직에 소론 대신들을 일부 포진시켜 둔 상황이었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삼수역의 실상이 드러나게 된다. 삼수역이란 칼로 왕을 살해하는 대급수, 독약을 사용해 왕을 시해하는 평지수, 허위 교서를 만들어 왕을 폐위시키는 소급수 등 세 가지 왕을 제거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 중 독약을 사용하는 평지수는 준비가 착실히 진행된 모양이다. 경종이 음식물을 먹은 뒤에 누런 물을 한 되나 토한 일이 있었다는 말이 실록에 적혀있다.
소론 준론은 건저와 대리청정을 주도한 노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네 명의 대신을 4흉으로 명명하고 사형을 건의한다. 사형은 집행됐다. 전광석화와도 같이 벌어진 일이었다. 노론은 경악했고, 세제 연잉군은 죽음의 공포에 맞닥뜨린다. <임인옥안>이라는 범죄기록에 역모의 수괴로 등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사가 없던 경종은 정적이 분명한 동생 세제를 살려둔다. 그리고 독약을 사용한 김 씨 궁인을 찾아내 배후를 추적해야 한다는 2년여에 걸친 소론의 주장을 잠재우며, 옥사의 확대를 막는다.
그리고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4년만에 경종은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삼수 역 중 평지수를 의심할 만한 대목이다.
탕평
탕평은 <서경>에 "불편부당(不偏不黨) 왕도 탕탕(王道蕩蕩), 부당 불편 왕도평 평(平平)"이란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이 서로 다른 주군을 선택하려는 이른바 택군(擇君) 현상을 타파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노론의 수장에 그치게 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노론과 소론의 당권파들은 정적의 제거에 목숨을 건 상황, 그리고 영조는 어찌 됐든 노론이 만든 왕이지 않은가 말이다.
역모사건이 잇달았고, 영조 4년에는 첫아들 효장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알고 보니 궁녀에 의한 독살이었다. 나주벽서 사건과 왕이 주관하는 시험장에서 영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글귀를 쓰는 등 집단자결을 하듯 소론 준론은 사라져 갔다.
탕평은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 노론 정국에서 소론은 대신들 뿐 아니라 그 자손들까지 제거되는 수난의 시대를 만난다.
사도세자
영조의 둘째 아들, 이선은 영조 11년에 태어났다. 그는 체격이 건장하고 무예를 좋아했다. 27년 뒤 이선은 영조 38년, 창경궁 문정전에서 뒤주 속에 갇힌다. 역사에 남은 세자의 엽기적인 사망사건, 임오화변(1762년)이다.
영조는 다혈질이었고, 눈물도 많은 왕이었으며 변덕이 죽 끓듯 했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냉정한 군주였다. 임오화변은 아들을 미치광이로 만들어 역모와 거리를 두게 한, 철저히 계산된 친자 살인이었다.
사도세자, 이선은 그런 부왕 밑에서 무려 27년간 아들이 아닌 세자로 살았다.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은 20여일 간의 관서행이었다. 그리고 정신병적 증상도 뒤주 속에 갇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된다. 그가 의지하고 또 그의 보호자를 자청했던 인물은 소론, 조재호였다. 세자는 뒤주에 갇혔고, 조재호는 동궁보호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사사당한다. 조재호는 사도세자의 죽은 형인 효장세자의 처남이었다.
그런데 세자 이선이 정신병증이 있었다는 주장에 반하는 기록도 있다. 영조 36년에 세자가 종기를 치료할 목적으로 온천으로 행차하면서 해프닝이 생긴다. 군마가 탈출해 전곡을 해치자 세자가 말의 주인을 처벌하고 밭의 주인에게 보상을 하게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애민군주로서의 자질이 보이는 대목이다.
사도세자는 동궁시절 궁녀와 환관, 그리고 일부 대신들로부터 경종의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노론 당파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소론 쪽으로 마음이 갔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은 강성 노론이었다. 정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부친과 아내, 장인이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 동의했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
이러한 가설을 온갖 서적과 자료를 뒤져서 개연성을 확보한 학자가 있다. 한가람 역사연구소의 이덕일 소장이다. 나는 그의 책,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