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정조)
조선에서 개혁적 군주로서는 사실상 마지막 인물이 정조다. 11세에 부친이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모습을 목도했다. 권력 앞에서는 가족 관계도 무의미했다.
친할아버지도 외할아버지도 어머니도 대신들 그 누구도 부친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세손, 이산은 백부(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양되어 25세에 즉위할 때까지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삶을 살게 된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 일성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노론 일색의 대신들은 경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심하지 않았다. 즉위하자마자 존현각 지붕으로 침투해 왕의 목숨을 노린 청부살인업자, 전흥문의 존재만 보더라도 노론의 기세는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노론 일파들에게 왕, 정조는 경외의 대상이 아닌 제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기회가 와도 칼춤을 추지 않았다. 피비린내는 최소화하고 침착하게 새로운 정치를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대신이나 대간들만이 아니라 내시, 나인, 궁녀, 의녀, 관노들까지 궁궐의 모든 스테프들은 노론 당파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설프게 복수의 칼날을 세웠더라면 일지감치 대급수나 평지수, 또는 소급수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왕은 잘 알고 있었다.
규장각을 만들어서 젊은 학자들이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게 했다. 서얼허통 제도를 만들어 서자에게도 벼슬의 기회를 제공했다. 당대에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대학자였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이 정조가 발탁한 서자들이었다.
수원으로 선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후 수원화성을 축조했다. 수원성으로 백성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금난전권을 폐지해 상업을 자유화한다. 상인들의 자연스러운 유입을 유도했고, 대유둔이라 불린 농지를 장용영의 하급관리와 백성들에게 제공해 수확을 국가와 절반씩 나누게 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확량을 자랑할 만큼 좋은 반응을 얻는다. 조선의 플랫폼 사업을 주도한 최초의 인물이 정조다.
정조는 노론 일파에 대한 피의 복수극보다는 수원이라는 새로운 복합도시를 만들어 국가의 균형발전을 꾀했다. 선친,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 하는 것과 수원화성을 축조하고 앞서 언급한 여러 제도를 정비한 후 자연스럽게 백성의 이주를 유도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꿈꾼 선친 사도세자를 신원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정조는 서자들과 규장각을 통해 새롭게 배출된 젊은 실학자들, 그리고 영남의 남인 유생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권력층에게 집중된 기득권을 우회적으로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맞지 않을까?
오회연교
정조 12년, 영남 유생들이 만 명 이상 상경해 상소를 올린다. 영조 4년 무신년, 이인좌의 난으로 시작해 전라도 경상도까지 번졌던 반역으로 영남지역의 선비들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다.
영남 만인소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인데,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반역에 맞서 창의의 깃발을 올리기도 했기 때문에 반역의 땅이라는 오명은 억울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당파다. 그러나 정조는 치세 25년간 복수의 칼을 갈지 않았다. 다양한 세력이 균형적으로 정치무대에 올라설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하고자 한 왕이다.
정조 자신이 백발을 백중시킬 만큼 명궁이었고, 대학자였으며 영조를 보필하면서 공부한 의술 또한 당대 최고였다. 그리고 20년 넘게 세손으로서 군주 수업을 받은 노련한 정객이기도 했다.
정조 24년 5월, 오회연교에 대한 해석은, 저자, 박시백의 설명을 보자
“25년 동안 노력했는데도 여전히 당색을 앞세워 상대를 죽이려 드는 습속에 대한 경고였다. 일반적인 경고인 듯 보이지만, 노론 벽파를 향한 것임을 알 수 있다.(209쪽)"
극강의 인내심을 발휘해 조화와 균형, 상생을 위해 노력했지만 노론은 오히려 시파와 벽파로 분화한다. 그리고 정조가 아끼는 젊은 실학자들을 서학(천주교)과 엮어 유배보내거나 패륜으로 낙인찍어 제거한다. 그리고 제도권 내부로 진입하려는 영남 유생을 막는 일에 전력투구한다.
정조는 오회연교를 발표하고 달포도 채 지나지 않은 6월 28일 눈을 감았다. 사인은 종기의 독이었다. '종기의 독' 이젠 익숙할 정도다. 백성들은 정조가 독살됐다고 믿었다.
정조에 끝까지 반대한 벽파는, 정조가 진행하던 모든 개혁조치들을 정지시킨다. 그리고 노론 벽파 중에서도 극히 일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며 세도정치의 시대를 열어젖힌다. 그리고 잦은 민란이 연이어 발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