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순조)
홍경래의 난
정조가 죽고 나자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수렴청정 중에 서학(천주교)의 뿌리를 뽑기 위해 신유박해를 일으킨다. 이로써 남인과 소론 세력이 완벽하게 제거된다. 노론 일극 체제의 독주가 시작된다.
정순왕후와 순조의 장인,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세도정치에서 세도는 노론 일파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핵심 인물들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안동 김 씨 세력의 맹주 김조순은 당대 최고 실력자로 불렸다.
농촌사회는 급격히 양극화된다. 이앙법이 보급되어 생산력이 늘어나고 화폐경제,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부농이나 거상이 된 평민들이 대폭 늘었다.
이들이 공명첩이나 납속책, 족보 구매 등을 통해 양반으로 편입된다. 그러니 조선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양반이 된다.
사실상 신분제는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각한 점은, 양반이 면제받는 모든 세금과 부담은 당연히 일반 백성들에게 전가된다. 사대부는 지배층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봐야 한다. 양심과 염치까지 상실한 것은 더 큰 문제였다.
홍경래의 난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다. 민란이다. 평안도 지방의 모든 백성들이 호응을 했다. 관군에 의해 진압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살육된 백성들을 제외하고도 포로로 잡혀 참수된 백성들의 숫자가 1,917명이나 된다. 이렇게 신분제의 공고함만을 추구하던 노론 세력들은 일반 백성들 삶의 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의 이력
정조 19년 창원 군수, 이여절은 가혹한 형정으로 자신이 통치하던 고을의 백성 25명을 장살 한다. 그리고 순조 1년,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 체포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이여절은 천주교 신도로 황 씨 성을 가진 사람을 붙잡아 고문을 해 거짓 자백을 받아낸다. 심각한 비위혐의로 사형의 위기에 처한 상황, 그러나 병조판서 심환지는 그가 사형되는 것에는 반대한다.
평생 절도에 충군 되도록 벌을 받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여절은 순조 22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된다. 이쯤 되면 불사조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여절은 그저 당시 수령들의 표본에 불과했다. 뇌물을 써서 고을의 수령이 되고 나면 마른 수건 짜듯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본전을 찾고 이익을 내서 윗선에 바치고 자신이 착복한다.
고을 수령은 임금 대신 백성을 직접 대면하는 자리다. 임금이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어도 임금을 보좌하는 대신들과 연결된 수령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발생한 이익을 나누는 일에 전문가가 된다. 수령 밑의 아전들과 향리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조선후기 농민들이 야반도주해 도적이 되거나 양반들의 노비가 되어 농토와 유리되는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백성들은 나라에 대해 울분을 쏟아내는 일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왕가의 비극
그러나 신분제가 붕괴되고 정부 소속 고위직부터 하위직의 공무원들이 사적 욕망에 사로잡혀 악행을 일삼으면, 백성들은 더이상 국가에 신뢰를 하지 못하게 된다. 불신이 임계점을 넘게 되면 백성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한번 뒤집어엎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혁명의 맹아다.
이미 임금과 대신들, 각급 관료들, 평민들과 노비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못했다. 순조는 제위 11년부터 몸이 좋지 않아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대리청정을 하며 부왕의 신뢰를 받던 효명세자가 있었지만 22세(순조 30년)에, 갑자기 각혈을 하다 죽는다. 그로부터 4년 뒤, 순조도 유명을 달리한다. 그러나 백성들이 비운의 왕가를 함께 슬퍼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백성들의 삶이 더욱 비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