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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rewriter Jan 02. 2021

10월 16일~10월 17일

10월 16일


1

  방화복을 입고 팔굽혀펴기를 할 때였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서 가슴이 땅에 닿았다. 교관은 납작 엎드려서 잠깐 쉬라고 말했다. 나는 비에 젖은 아스팔트에 뺨을 대었다. 왼쪽에 댔다, 오른쪽에 댔다 하면서 얼굴을 식혔다. 기분이 좋았다. 이 시원한 느낌은 말로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방화복을 입고 찜통이 된 몸에 유일하게 노출된 부분은 손과 얼굴뿐이다. 빗물에 젖은 이 축축한 바닥이 너무 소중하고 또 시원했다. 힘든 순간이 오면 사소한 것들이 귀하게 다가온다. 한줌의 숨이 그렇고, 한 모금의 물이 그렇다. 별것 아닌 게 크게 다가오는 가슴은 얼마나 뜨겁고 하찮은가. 이 하찮은 마음을 간직하는 어른으로 살고 싶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체력단련은 끝났다. 동기들의 방화복에서 스멀스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겨울이 올 것이다. 날은 추워질 것이고, 훈련은 고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방화복에서 피어오르는 김 역시 더욱 활짝 피어오를 것이라 믿는다. 동기들의 비와 땀이 섞인 얼굴엔 웃음이 묻어있다. 첫 단추를 끼웠기 때문이다. 앞으로 14주 동안의 험난한 여정을 함께할 동기들이 있어서 좋다. 싱글벙글 바보같이 웃음이 나온다.


2

내가 쓰는 시의 대부분은 매우 개인적인 체험이 담겨있다. 단순히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방식의 글쓰기는 힘이 있다. 하지만 모든 시가 그렇게 되어선 곤란하다. 지면에 발표되지 않은 시까지 포함하면 총 40편 가량 되는데, 시가 대체로 비슷한 패턴으로 쓰이다보니 단조롭고 지루한 감이 있다. 그것은 짐짓 상투적으로 보인다. 작년에 데뷔를 했는데 시를 어떻게 써야겠다는 방법론은 고사하고 이상한 매너리즘에 빠져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잡지에 발표되는 시인들의 글을 보라. 그저 부모를 앞세운 글만 써서는 좋은 작가로 거듭날 수 없다.


네 멋대로 써라*


시. 시.

그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아픈 마음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데


나의 마음은 아무렇지 않다


못난 마음 뉘우친다고 가슴째 쇠갈고리에 걸친다

그 복판 앞에서 한껏 뻗은 주먹은 되레 내 얼굴

때리던 아버지, 뇌 병변 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향한다

둘은 샌드백처럼 휘청이며 툭, 툭, 나를 밀쳐낼 뿐


내가 내지른 건 반성의 무게가 아니라

알량한 자존심과 까닭 모를 울분을 실은

물 주먹이었으므로


멀쩡한 허우대로 태어나

용돈 없다 반찬 없다 부모에게

투정하는 이놈의 몹쓸 동냥아치는

주먹을 잘도 피해왔으므로

나의 마음은 아무렇지 않다


시. 시.

비쩍 마른 입술과 탈진한 몸은

그것이 입에서 나는 소리라고 말한다


내가 껴안아 온 건 터진 샌드백이 아니라

바스라지지 않는 비굴한 위선의 쌀가마니였으므로

물에 만 밥처럼 끼니 삼아 한 움큼씩 욱여넣는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말뿐인 시를 쓴다


주먹세례를 피해 줄행랑치면서

남들에게 그저 구걸이나 하면서


*《내일을여는작가》, 2020년 하반기호(통권 77호).


 「네 멋대로 해라」는 ‘자학’의 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뿐이다. 누구나 시를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쓴다. 시인은 시를 갖고 동냥하는 사람이다. 나의 아픔을 드러내는 일이 ‘동냥’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을 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네 멋대로 쓰라’는 건 쓰는 게 시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는 ‘~해야 한다’는 원칙을 무너뜨리고 싶다. 그 방법을 나는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 「내일을여는작가」 77호에 발표를 했지만, 괜히 큰소리를 친 것 같아서 부담이 된다. 다음엔 어떤 시를 발표해야 할 것인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하는 시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할 틈이 없다. 나는 지금 훈련 중이고 무언가에 집중할 여력이 없다. 이제 게으름을 피워선 안 된다.


10월 17일


1

영어교육도시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영어교육도시는 제주도에 있지만, 도민에게 낯선 곳이다.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이곳은 신축 건물이 많이 지어졌다. 도로엔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서 마냥 조용한 곳인 줄 알았다. 카페 문을 열었을 땐 완전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좌석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자리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맥북을 켜고 웹 서핑을 하거나 과제를 했다. 국제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인 모양이다. 다들 부티가 났다. 루이비통 백팩을 빈 의자에 패대기를 치고는 베이글을 먹으며 유튜브를 보는 학생이 눈에 밟혔다.

국제학교의 위치는 제주도지만, 실제로 이곳은 제주의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제주의 느낌을 완전히 지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다운 것’을 꼭 지켜야 한다는 편에 있는 건 아니지만,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내가 저 나이 때였다면, 그런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따뜻한 조명, 시끄러운 분위기……. 이런 곳에 있으면 마음이 묘해진다.

2

밀린 빨래를 했다. 나 없는 동안 방엔 먼지가 쌓였다. 이런 걸 치우기 위해서라도 아침엔 일찍 일어나야 한다. 오랜만에 운동도 했다. 몸은 굳어 있었다. 다음 주 훈련이 걱정이다. 읽기로 한 시집은 아직도 읽지 못했다. 시간이 없다. 화재대응능력 2급 필기시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주 동안은 잠자코 그것만 해야 한다. 필기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2주 뒤에 실기평가를 한다. 실제로 3주 정도 묶여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과락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낭만적인 감상 따위는 잠시 내려두기로 하자.

3

문구점에서 형광펜을 샀다. 사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코너를 돌면 또 다른 물건들이 펼쳐진다. 각자에겐 아마 그런 물건들이 있을 것이다. 유용해 보이지만 막상 사면 쓰지 않을 물건들, 외면하자니 마음 한구석에 맴도는 것들 말이다. 필기구가 대표적이다. 집구석에 처박아둔 수많은 필기구를 떠올리면 내 자신이 한심해진다. 아직 나는 생활의 지혜가 부족한가보다. 진열대에 줄 세워둔 물건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아무래도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쟁여둔 문구도 많으면서 나는 이것을 사고 집에 갔을 때의 상황을 미리 상상한다. 사 놓고 다 써본 적 없는 물건들이 다들 더러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지우개 같은 물건이 그렇다. 개개인의 복잡한 생활은 다 지워지지 않는다. 지우개를 다 쓸 만큼 우리는 무모하게 연필을 쓰지 않는다. 그 작은 지우개 하나도 사실은 과한 것이다. 애초에 지울 수 없다면 그저 버리면 그만이다. 샤프심도 마찬가지다. 잘 닳지 않는다. 나는 몇 백 원짜리 샤프심을 수년 째 쓰고 있다. 부지런히 써도 이것들은 지긋지긋하기만 하다. 공책은 또 어떤가. 공부한답시고 산 공책들은 실은 장식품이나 다름없다. 나름 필기를 많이 하는 편이데 종이는 줄지 않는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 방을 지저분하게 한다. 어쩌지, 하면서 나는 그대로 둔다. 먼지가 쌓여도 그냥 둔다. 방치된 물건들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사실은 다 지울 필요도 없고, 다 채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면 마음속에는 찌끼 같은 게 남는다. 생각할 필요 없는 것들, 괜한 기대들, 이뤄지지 않을 일들, 해소되지 않을 일들……. 마음엔 총량이 없나보다. 이런 생각들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근심은 왜 이리 많은지,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인데 말이다. 단편적인 것에 혹하지 않고, 두고두고 쓸 수 있는 것들이 뭔지 살피는 지혜를 기를 때다.

4

버려진 것만 못한 물건도 있다. 진열대에 떨이로 올려놓은 물건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특히 점포를 정리한답시고 스포츠웨어를 헐값에 내놓은 간판을 볼 때면 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처음엔 싸게 무언가 건질 수 있겠다는 기대로 매장을 들어간다.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한다. 좀체 여기엔 내가 입을 옷이 없다. 이것을 많게는 80% 싸게 파는 이유를 알게 된다. 분명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메이커’ 상표를 붙여놓았는데도 무더기로 헝클어진 이 옷들은 외면당하기 일쑤다. 헝클어진 옷들은 한데 뒤섞여 일대 장관을 이룬다. 매장 곳곳에 사람들은 옷을 자기 몸에 대어보고는 펼쳐진 그대로 던져놓는다. 나름대로 분류해놓았던 형형색색의 옷들은 뒤엉킨 상태로 방치된다. 과장을 보태면 그 옷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뭉친 형상으로도 보인다. 이들은 정리되는 점포가 망하지 않도록, 이 점포에 오래도록 남기 위해 연대하는 것 같다. 기실 그것은 표류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흔히 아는 상표가 붙었는데 왜 외면당할까. 유행이 지났다든가, 엉뚱한 부위에 이상한 그림이 그려졌다든가 하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아니, 다 떠나서 총체적으로 그 옷이 별로인 까닭이다. 이런 옷을 왜 만들까 하는 삐뚠 마음도 든다. 글도 그렇다. 떨이로 팔리는 물건들이 어쩌면 내가 쓴 글의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미래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글이 무엇인지, 어떤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글을 써야 한다. 거기에 몰입할 때 대중에게 주목받는 글이 된다. 시를 쓴다고 하면 사람들이 ‘시인님’, ‘작가님’ 하고 호칭을 붙여주지만 하지만 나는 그런 ‘작가님’ 소리에 안주하고 싶지 않다. 작가는 어떤 직책도 아닐뿐더러 특별한 발언권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으레 사람들이 글 쓰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인 것이다. 내가 쓴 글을 읽고 사람들이 나의 이름보다는 나의 작품을 더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나는 ‘이름’보다는 ‘작품’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책장 어느 한 공간을 차지할 뿐인, 그저 작은 부피로 환산될 뿐인 그런 책은 내고 싶지 않다. 기왕에 쓰기로 한 거 정신 바짝 차리고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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