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정말 딱 한 시간이었다. 교육생들은 파김치가 됐다. 날이 저물자 한결 몸이 괜찮아지는 것 같다. 마음이 기꺼웠다. 훈련이 막바지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입에 단내가 난다. 물이 마시고 싶었다. ‘파이팅’ 구호를 연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이라고 선창하면 ‘소방관이다’라고 뒤따라 외치는 무리도 있었다. 악에 받친 소리는 하나로 잘 뭉쳐지지 않고 엇박자로 흩어졌다. 숨이 차서 나는 구호를 붙이지 못했다. 동기들에게 미안했다.
2
오르막길이나 트랙 위를 전력질주 하면 가슴이 터질 만큼 숨이 차다. 가슴은 쉬이 터지지 않았다. 쓰러진 사람도 없었다.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살던 나인데, 그럴 때면 나는 심장 위에 손을 얹는 습관이 생겼다. 말하는 입은 ‘죽겠다’고 중얼대지만 그건 거짓이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해 피를 쥐어짜는 심장의 몸부림, 이게 참이다. 유치하다고 지청구를 하겠지만, 나는 그 두근거림을 통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동기들 모두가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더 잘 뛰고 싶고, 더 잘 버텨보고 싶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잘살고 싶을 테고. 하지만 우리는 자기만 잘살자고 이 훈련을 받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3
버피, 팔굽혀펴기, 팔 벌려 높이뛰기, 레그 레이즈, 그리고 인터벌 트레이닝까지. 체력단련은 아주 알차게 진행됐다. 교관의 호각에 맞춰 스쿼트 자세나 팔굽혀 펴기 동작을 했다. 야속하게도 K교관은 호각을 입에만 물고 불지 않았다. 자꾸 자세가 무너졌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초점을 반쯤 흐리게 하고 먼발치를 쳐다보기로 한 것이다. 호각을 입에 문 모습을 보는 건 부질없이 ‘희망’에 기대를 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흐리멍덩한 눈이었지만, 호각을 쳐다볼 때보단 몸이 버틸 만했다.
인터벌 트레이닝을 하다가 헛구역질을 몇 번 했다. 손가락을 목구멍에 휘저었다면, 아마 나는 축구 골대에 오늘 먹은 양념게장을 게워냈을지도 모른다. 무튼 잘 버텨내서 다행이다. 이 모든 생각들은 훈련이 끝나고 나서야 드는 생각이다.
4
손끝에 거스러미가 많이 생겼다. 방화복을 입을 때, 장갑을 낄 때, 로프를 만질 때 생긴 것들이다. 내 손은 아직도 부드럽고 약하다.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물 한 모금 따위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지만, 그만큼 사소한 것들에 신경이 쓰이나보다. 아파도 참아야지 어쩌겠나. 그냥 해야지. 그냥.
1
점심시간이 끝나면 오후 일과를 시작하기 전 아주 ‘잠깐’ 크로스핏을 한다. ‘타바타’라고 불리는 운동을 하는데, 20초 동안 버피나 스쿼트(점프 스쿼트를 하기도 한다)를 최선을 다해 실시하고 10초 동안 쉰다. 이 짓을 여덟 번 반복하면 그것이 ‘타바타’ 운동의 한 세트가 된다. 우리는 4분짜리 운동을 3세트 했다. 딱 12분이면, 간단한 ‘몸풀기’가 끝난다. 교관은 우리가 쉬도록 놔두지 않는다. 앞에서 타바타 운동을 같이 해버린다. 그저 막무가내로 동작을 강요하지 않고, 우리가 힘의 최댓값을 낼 수 있도록 동기부여 한다. 교관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로봇에 가깝게 운동을 한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앞으로 ‘더 심화된 동작을 배우게 될 텐데 그때부터 운동은 더 재미있어질 것’이라고 했다. 12분은 긴 시간이다. 멀쩡하다는 사람도 숨이 넘어간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나서 버피를 하면 몸 안에 있는 내장기관이 정신없이 엎치락뒤치락한다. 처음엔 헛구역질을 했지만 지금은 숨이 조금 차도 적응하고 있다.
금요일엔 ‘배틀로프’라는 동작을 배웠다. 밧줄 대신 소방호스를 위아래로 휘두르는 운동이다. 전완근에 자극이 많이 간다. 타바타 음원에 맞춰서 20초, 10초 운동과 휴식을 번갈아가면서 진행한다. 교관은 호스가 물에 젖어야 더 무거워지니, 비 오는 날 한 번 더 하자고 한다. 젖은 바닥에 호스가 파닥거리는 소리가 경쾌하다나 뭐라나.
2
‘나’를 지우고 ‘우리’를 기억하라는 한 교관의 말이 왕왕 뇌리에 스친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목요일과 금요일, 방화복을 입고 4km 구보를 하면서 이해했다. 이건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옆에 함께 뛰는 사람이 있고, ‘파이팅’, ‘동기야, 힘내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백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첨단과학기술단지의 언덕은 마치 하늘로 이어진 길처럼 가팔라 보인다. 뛰다보면 저물녘의 하늘이 아뜩하게 밀어닥친다. 정말 정신을 놓고 싶을 때 ‘조금만 더 힘내’라며 뒤에서 내 등을 미는 동기가 있다. 그도 숨이 차오르긴 마찬가지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 오르막을 결국엔 넘었다. 땅만 보고 뛰었다. 빨간색, 회색 보도블럭의 패턴을 보면서 넋을 놓다보면 나는 먼발치 수평선이 보이는 고지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뒤를 따라 힘겹게 경사면을 오르는 동기들에게 ‘힘내라’고까지 말하게 된다. 머릿속의 모든 것을 지우고, ‘동기’, ‘보도블럭 패턴’만 생각했다. 구보를 마치고 방화복을 벗으면, 온통 땀투성이인 내 몸으로 찬바람이 들이찬다.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그렇게 혼자 뛰라고 하면 완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기’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동기는 소중하다. ‘동기’는 관념적인 단어가 아니다. 동기는 내 옆에 땀에 전 채로 비루한 모습을 하고 있다. 버릇처럼 허공에다 목이 쉬도록 ‘파이팅’ 하고 외친다. 서로 수고했다며 찐득하게 포옹하기도 한다. 초라한 모습이라도 한 아름 끌어안을 수 있는 우애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