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격해질 때 인생은 수학문제와 같다고 스스로 되뇐다. 실제로 인생과 수학은 꽤나 닮은 점들이 있다. 정확하게는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고, 그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유사점은 두 개의 것 모두 자연의 법칙에 따라 흘러간다는 점이다. 그 자연의 법칙을 우리는 삶에서 "순리"라고 표현하고 수학에서는 "공식"이라고 부른다. 더 많은 공식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한 만큼 어려운 수학 문제를 잘 풀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는 더 많은 삶의 "순리"들을 이해할수록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다
베스트셀러 "역행자"의 저자 자청은 과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자청을 무시했고, 그와 친구 하고 싶어 하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읽게 된 데일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고 그 책에서 배운 내용을 주변 사람들에게 적용하게 된다. 그 책의 내용대로 사람들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 인정해 주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자청과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자청은 이를 통해 인생에도 게임처럼 "공략집"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자청이 말한 "공략집"이라는 표현이 내가 말한 삶의 "순리"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좋은 "삶의 순리", "인생 공략집"이라고 할 수 있는가? 파괴적 혁신이론으로 유명한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 故클레이튼. M크리스텐슨은 그의 책 하버드 인생학 특강에서 좋은 이론의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좋은 이론의 가장 큰 특징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행기의 기본 이론이 된 베르누이의 원리는 비행기뿐만 아니라, 날아다니는 새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나는 데 있어서 깃털의 필요는 새에게는 유용할 수 있겠지만, 육중한 비행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즉, "날기 위해서는 깃털이 필요하다"는 이론은 특정 상황에서만 적용 가능한 피상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은 사람들이 호소하는 심각하고 괴로운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필자 역시 과거 아버지의 병세로 어려움이 있을 때, 즉문즉설에 출연하여 스님의 답을 들은 경험이 있었다. 질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심 "내 질문이 너무 난해하여 스님이 바로 답하지 못하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면 어쩌지?"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나의 과한 걱정이었다. 스님은 나의 질문을 듣자마자 마치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막힘없이 답하셨다.
아버지의 병에 대한 스님의 대답을 일부 공개하면 이렇다. "떨어지는 낙엽은 나를 슬프게 하기 위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보며 슬퍼하는 나의 마음은 나의 마음을 다스려서 해결해야 하는 나의 문제다.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부모님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은 효라 할 수 없다." 스님이 주신 답변으로 나는 감정에 가려졌던 인생의 진리를 볼 수 있었다. 그 말씀을 통해 내 과제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담담하게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남은 가족의 마음도 살필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스님이 질문자가 호소하는 다양한 고민과 문제에 즉각적으로 답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비결로 다양한 삶의 현상을 관통하는 깨달음에 있다고 감히 추측한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중에 법륜스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 더 떠오른다. 바로 "지식이 없으면 사는 게 불편하고, 지혜가 없으면 사는 게 괴롭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많은 지식을 습득한다. 이름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치열한 지식 경쟁을 벌인다. 이 시기에는 "좋은 학교에 입학하면 성공한다"라는 이론에 대한 비판적 자세는 금기가 된다. 마치 하늘을 나는 깃털 달린 새를 보며 "우리도 깃털을 꽂으면 하늘을 난다"라고 결론을 내려 버린 것처럼 말이다. 너도 나도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한 지식 쌓기 경쟁에 돌입한다. 날기 위한 깃털 꽂기 경쟁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명문대의 앞글자를 모아 SKY라 부르고, 학원 이름도 비상, 하늘, 스카이.. 등등 이 많은 걸 보면 이 비유가 잘못된 건 아닌 듯싶다. 이 현상에 대해 더 논하고 싶지만 이글의 주제가 "무언가 잘못된 사교육 현황"은 아니므로 이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겠다.
어쨌든 우리는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쌓고, 좋은 학교 간판과 스펙을 만들기 위해 경쟁한다. 정작 삶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지혜" 쌓기는 뒤로 미룬 채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삶의 순리"이자 "공략집"이자 변덕을 부리지 않는 "좋은 이론"을 말한다. 그런데 나의 불안 감정은 내가 마주한 문제들을 나의 지혜 수준으로 감당하기 벅찰 때 찾아왔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할 때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던져버리고 도망가느냐, 문제를 풀기 위한 "공식"을 발견하고 이해하느냐.
내 앞의 문제를 던져버리고 도망갈 때 나타나는 현상은 보통 "남 탓 하기", "환경 탓 하기", "도망감을 합리화하기 위한 신체화 반응 겪기",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술 마시기" 등. 그런데 이 선택지의 결과는 보통 "지친 나"가 전부다. 문제는 꿈쩍하지 않고 내 앞에 놓여있다. 아니 어쩌면 문제는 전보다 더 복잡하게 꼬여버렸을 수도 있다.
반면, 나를 불안하게 하는 문제를 마주하고 문제 풀이를 위한 "공식"찾기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이 옵션 선택의 결과는 보통 다음과 같다. "지친 나", "더 성장한 나" "문제 해결의 결과: 성공 혹은 실패" 지친 나는 전자와 동일하다. 하지만 "예전보다 더 성장한 나"와 문제 해결의 결과도 남게 된다.
물론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공식"찾기 여정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와 마주하는 과정에서 나의 한계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 영역을 미지의 가능성으로 남겨 두려 한다. 즉,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심리적으로 보호하는 "자아"의 유혹이기도 하다. 내가 불안하고 괴로울 때 내 인생을 수학문제 풀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정적인 반응과 자기 방어적 태도는 수학문제를 푸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문제 풀이 자세"를 견지하면 불필요한 감정적 에너지 소비를 아낄 수 있다. 대신 문제 풀이에 주력하는 "고차원적 자아"를 자리에 둘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내가 느끼는 불안 감정은 매몰될 대상이 아니라 문제 풀이의 한"변수" 따위가 된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이 감정을 응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냉정하게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보다 위대한 자의 글이나 말을 읽고 경청하며 문제 풀이 "공략법"을 배울 수 있게 된다.
불안한 감정이 몰려오면 "내가 풀어야 할 인생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 문제 풀이에 필요한 자연의 법칙, 공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자문해 보기를 권한다. 더 냉정하고 넓은 시야로 상황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 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불안 감정은 우리를 더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