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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힘행 Oct 09. 2021

마법사, 미야자키 하야오



초등학교 다닐 때 교실 안에서 만화책이 돌아다니곤 했지만 나는 무관심했다. 

만화는 유치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고, 내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고르던 중에 스튜디오 지브리(Ghibli)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사랑하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만들어낸 주인공, 미야자키 하야오의 팬이 되었다. 지금부터 만화는 어린애들이나 상대하는 것이라고 무시한 애늙은이였던 나를 어린아이로 돌려놓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어쩌면 누구나가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순간, 혹은 인상적인 경험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뽑아내는 씬(Scene) 크리에이터이다.  "바람이 분다."에서 주인공이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연인에게 날리는 장면은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장면 중 하나이다. 어린아이에게 신문지로 종이비행기를 접는 것을 보여줘 보라. 2차원의 종이가 3차원의 비행기로 변신할 때 아이들은 얼마나 좋아하는가. 그리고 종이비행기를 허공에 날렸을 때 '부웅~'하고 날아오르는 광경이 펼쳐지면 그 아이는 이 세상을 모두 가진 것처럼 환호한다.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지로는 어려서부터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꿈을 꾸었지만, 시력이 나빠 대신 비행기 디자이너가 된다. 종이비행기는 여기서 중요한 오브제이다. 그의 꿈이 담긴 비행기라는 모형을 통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실어 보냈던 것이다. 작은 종이비행기는 살아 있는 것처럼 바람을 타고 연인에게로 날아간다. 바람을 타고 연결된 운명을 종이비행기 날리는 한 장면으로 풀어낸 작가의 안목과 재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지로, 종이비행기 장면을 찾다가 할 수 없이 이 그림을 삽입했다.


관객들이 뽑은 최고의 장면 역시 흥미로운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괴물들(귀신들)이 목욕하는 장면이다. 더러움이 씻겨 내려갈 때 묵은 때가 빠져나가는 시원함과 통쾌함을 많은 사람이 좋아했던가 보다. 나 역시 이 장면을 보았을 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25년 전 세례를 받으려고 물속에 들어갔을 때 죄 목록에 적혀 있던 나의 죄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면 그 장면과 흡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귀신들의 오물 신, 하야오 작품 중 내가 뽑은 최고의 명장면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가 어렸을 때 자주 꾸던 꿈속 장면들을 마치 내 꿈속에 들어와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하여 놀라게도 하고 아무 걱정이 없는 어린 시절로 나를 데려가 준다. 어른이 되면서는 잘 때 꿈을 잘 안 꾸거나, 꿈을 꾸었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생각이 안 나 꿈을 꾸지 않았다고 말하곤 한다. 잠을 자면서 꿈을 꾼다는 것은 아직 성장할 여지가 있는 것만 같다. 예를 들어, 하늘을 나는 꿈은 어린 시절에 누구든지 예외 없이 꾸는 꿈일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하늘을 나는 꿈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도 참 많이 꾸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꿈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비행기 마니아여서 '지브리' 이름을 비행기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 속에 비행체가 등장한다. 미래 도시 풍경 속에, 그리고 판타지 속에 하늘을 나는 인물들이 나온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마법사인 하울은 곤경에 처한 소피를 구해 하늘을 날아간다.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고양이가 버스로 변신하고 하늘까지 난다. 하늘을 나는 주인공을 보면서 내 꿈속 장면들이 되살아났다. 하늘을 날면서 황당무계한 모험을 떠났던 어린 시절의 꿈을 생각해내고 나니, 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마법사 하울이 소피를 구해 하늘을 나는 장면, 하울이 너무 잘생겼다. 


어느 날, 아이들이 시리얼을 와장창 엎었다. 그런데 그날 나는 평소 진지한 나의 모습과 180도 다르게 만화의 한 페이지처럼 했다. 마침 마룻바닥 청소를 끝낸 참이니 "모두 엎드려!" 아이들에게 주문을 걸었고, 모두 인간 진공청소기가 되어 쏟아진 시리얼 알갱이들을 와글와글 입 속으로 흡입해버렸다. 이날 우리 집 아이들은 자기들 수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엄마를 보며 믿을 수 없어하면서도 한참이나 웃었다. 어떤가. 걱정 없이 어지르며 노는 아이들처럼 해보아도 괜찮았다. 말도 안 되는 만화 놀이를 하면서 우리들은 너무나 즐거웠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나를 쉬게 만든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덕후가 되면서 비로소 나는 아이들처럼 만화를 즐길 수 있었다. 애늙은이였던 나는 만화를 쳐다볼 만큼 해맑지 못했다. 사춘기도 건너뛰고 어른이 되었다. 보챈 기억도, 투정 부린 기억도 없는 나는 어른이 된 후 오히려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았다. 정작 책임져야 할 일들이 쌓여 있는데 쉬고 싶었고, 놀고 싶었다. 


이따금 피곤에 쪄들다가도 마법 같은 그의 작품들을 보고 기운이 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올해 80세,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여전히 새로운 작품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동문학가 요시노 겐자부로의 청소년 소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애니 화한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듯하다. 지브리 역사상 가장 느린 작업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과거에 그가 한 달 동안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작업했다면, 지금은 한 달 동안 1분 분량의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므로… 


어린아이는 세월이 흐르면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다시 어린이가 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의 만화는 생각에 굳은살이 박혀 버린 어른인 나에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만 같다. 다시 아이처럼 신나 해도 괜찮다고. 한바탕 엉엉 울고 나서는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어린애들처럼 울어도 좋다고 말이다.

잘 놀 줄 알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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