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저 세상 너머로 나아가보자

부다페스트부터 시드니까지, 교환학생부터 여행자를 거쳐 워홀러까지

by 슈잉

#0. 나는 언제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다짐했는가?


중학교를 다닐 때, 아마도 진로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는 질문과 함께 인생 로드맵을 그리는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나의 꿈은 정말로 원대했다. 환경복원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서울 한복판에 땅을 사 도시 숲을 만들고자 했으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도 만나고 UNEP에서 일하는 저명한 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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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노트에 22살에 교환학생을 가겠다는 나의 꿈 역시 함께 적혀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운명인지,

2022년 22살이 된 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그토록 원하던 교환학생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교환학생을 간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후부터 정말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언제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다짐했어?"였다.


사실 나도 명확하게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 시작은 2014년도였으리라고 생각한다.


2014년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 겨울, 오빠가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약 한 달간의 시간 동안 어학원을 다니면서 영어를 공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오빠가 하는 건 모두 다 해야 직성이 풀렸던 나는 오빠가 가기 며칠 전부터 나도 가겠다고 울고 불고 떼를 썼다. 물론 나는 오빠와 함께 갈 수 없었고, 나를 달래기 위해 부모님께서는 교환학생 이야기를 해주셨다. 대학교에는 교환학생이라는 프로그램이 있고, 교환학생을 가면 한 달이 아니라 자그마치 한 학기를 외국에서 생활할 수 있다고, 지금은 어려서 오빠처럼 해외에 간다 한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없으나 그때가 되면 내가 모든 걸 다 결정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부터 교환학생을 가겠다는 생각은 항상 내 머릿속에 있었던 것 같다.


2020년, 대학을 입학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나는 대학생 다운 생활을 누리지 못했다. 코로나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21살이 돼버렸고, 내가 기대하던 대학 생활과는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였다. 이러다가 덜컥 4학년이 되고 졸업을 해버리게 될까 순간 겁이 났고, 어떻게 해야 이 대학 생활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교환학생이 떠올랐다. 당시에 코로나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고학년이 되기 전에 빠르게 교환학생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든 그 순간부터 교환학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 그런데 왜 부다페스트로 가는 거야?

단언컨대 이 질문은 내가 교환학생을 합격했다고 알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다. 정말 30번도 넘게 이 질문을 받았던 것 같은데, 사실 큰 이유는 없다.


교환학생을 지원할 당시에 나의 첫 번째 조건은 유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이왕이면 수도로 가고 싶었다. 이렇게 보면 참 간단한 조건이지만, 내 전공이 이 간단한 조건을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교환학생, 그중에서도 주요 학과가 아닌 환경공학이라는 전공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은 너무나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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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공학과 비슷한 이름의 학과를 가진 학교는 헝가리, 리투아니아, 스웨덴과 미국, 총 4개국 4개 학교 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미국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를 하니 3개 국가가 남았고, 학과 이름은 비슷하지만 학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과목이 없었던 스웨덴과 대학원생만 교환학생을 갈 수 있는 리투아니아를 제외하고 나니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ELTE밖에 없었다.


다른 원하는 국가에 다른 학과로 교환학생을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1 지망으로 비인기 국가인 헝가리 ELTE 하나만을 지원하는 특이한 지원자가 되었다. 국제교류처에서 보기에도 내가 특이한 지원자로 보이긴 했던 것 같다.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인기 국가도 아니고, 프랑스 파리와 같은 도시도 아니고, 내 전공이 엄청나게 유명한 것도 아닌 헝가리 부다페스트 단 하나만 지원한 지원자. 그래서 그런지 나는 교환학생 면접 당시에 이와 관련된 질문들만 계속 받았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 1지망이 간절했었다. 내 휴대폰 배경화면은 부다페스트 ELTE 하나만 지원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미 부다페스트 사진으로 바뀌어있었다. 이번에 불합격해도 1지망 하나만 지원했으니 그럴 수 있고, 다음 학기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쿨하게 행동했지만 사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불안했고 초조했으며, 합격하기를 바랐다. 자기소개서를 계속해서 고치고, 면접은 스스로 질문을 반복해서 질문하고 매번 다르게 답하는 방식으로 준비하였다. 면접 당일, 내 순서가 예상보다 1시간 넘게 딜레이 되었는데 당시 8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떨어서 담요를 덮은 채로 면접을 보았다.


언제 나오는지도 모르는 결과 발표만을 기다리며 하루에 수십 번씩 국제교류처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했고, 언제 결과가 나오는지 직접 전화해보기도 하였다. 친구가 오랜만에 서울에서 내려와 같이 행궁동에 간 날, 교환학생 합격자가 예상보다 이르게 발표되었고, 나는 1지망 하나만 지원하여 1지망에 합격한 행운의 아이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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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교환학생 지원 전, 내가 헝가리에 대해 아는 거라곤 평창 동계올림픽에 나온 잘생긴 쇼트트랙 선수밖에 없었다. 부다페스트는 유명한 관광도시이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부다페스트가 헝가리의 수도라는 것은 모르고 있을 정도로 이 나라에 대해 무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환학생을 가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부다페스트에 지원했고, 합격 당시에 너무 기뻐서 말문이 막히는 것을 경험했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모험에 첫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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