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부터 시드니까지, 교환학생부터 여행자를 거쳐 워홀러까지
#3. 교환학생을 가기 전, 어떻게 준비했나요?
대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교환학생에 합격했다면 그때부터는 서류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학교들은 한국에 있는 파견국 대사관에서 미리 비자를 발급받게 되는데 이때 매우 골치 아픈 사항들이 많다. 비자 발급을 받기 위해 대사관에 예약을 잡고, 각종 서류들을 준비하고,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고, 파견교로부터 메일을 기다리는 그 긴 시간 동안 많은 설렘과 기대가 오고 간다.
나는 다행히도 파견 전에 해야 할 서류는 따로 없었다. 파견교에 수강희망과목 신청 서류를 제출하는 것이 전부였던 듯하다.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이 아예 없었지는 않다.
첫 번째로, 분당 서울대 병원에 가서 예방접종을 맞았다.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가면서 무슨 예방 접종을 이냐고? 맞는 말이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은 여행이나 입출국, 거주를 위해 따로 요구되는 예방 접종 사항은 없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교환학생이 끝난 후 남미로 여행을 갈 계획을 짜고 고있었다 남미는 내게 꿈의 여행지와도 같은 곳인데 한국에서 미국을 거쳐 남미로 갈바에는 유럽에 온 김에 유럽에서 남미로 가겠다는 마음이었다. 남미의 일부 국가들은 우리가 면역을 가지고 있니 않은 일부 질병들이 있기 때문에 권고되는 예방접종들이 이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황열과 장티푸스 주사를 맞았고 말라리야 약을 처방받아왔다.
당시 내가 병원에서 쓴 돈은 총 총 107,600원.
내가 교환학생이나 여행을 하면서 쓴 돈에 비하면 그다지 큰돈은 아닌 게 분명 하나 내가 내 돈으로 이렇게 큰 금액의 병원비를 결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내 용돈이 50만 원 정도였으니, 병원에서 하루 만에 10만 원을 쓴다는 것은 내게는 꽤나 파격적인 지출이었다.
이렇게 돈을 쓰고 나와 든 생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남미는 간다.'였다.
두 번째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였다.
놀랍게도 코로나가 끝나지 않았던 그 당시에도 인천 국제공항에서 부다페스트 페렌츠 리스트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직항 항공편이 있었다. LOT 폴란드 항공이 직항 노선을 매주 월요일마다 운행하고 있었고, 국제 학생증을 통해 해 할인을 받으면 꽤나 합리적인 가격에 46KG라는 엄청나게 많은 짐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LOT를 이용하지 않고 뜬금없이 카타르 항공을 이용하여 부다페스트로 가는 티켓을 구매하였다. 그 이유는 딱 하나, 카타르를 여행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출발해 도하 국제공항으로 먼저 도착해서 25시간의 경유 시간을 보낸 후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여정이었는데, 그 25시간을 이용해 도하를 둘러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카타르를 여행하고 싶은 이유도 명확하지 않았다. 중동 국가를 여행해 본 경험은 한 번도 없었고, 당시에 카타르는 2022 카타르 월드컵을 위해 도시를 정비하고 축제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월드컵 기간에 카타르를 방문할 수는 없으니,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가서 도시를 여행하고 후에 월드컵을 통해 도시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지켜보겠다는 게 그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이 계획에는 문제가 많았다. 첫 번째로 이렇게 여행을 할시 헝가리 입국 조건인 72시간 내에 발급된 PCR 음성 확인 증명서의 인정 여부가 애매해진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72시간의 시작을 검사 시간으로 하느냐, 증명서 발급 시간 기준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많은 정보들을 알아보았지만 물론 답은 내리지 못했다. 두 번째로는 카타르 항공에서 제공하는 무료 시티투어와 호텔과 연계해서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모션이 코로나로 인해 사라진 상태였다. 세 번째,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비행기가 아침 8시에 출발하기 때문에 최소 6시에는 공항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러나 도하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서 그 시간에 공항버스가 있는지, 택시는 잡히는지 등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조차 없었다. 네 번째, 두 항공편 사이의 시간 간격이 24시간이 넘을 경우, 공항에서 짐을 찾고 다시 체크인을 해야 한다. 나는 최소 35KG의 짐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나 혼자 이 짐을 끌고 도하에서 움직이기란 사실상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은 카타르 항공에 전화해 도하 국제공항에 도착한 후 3시간 반 후에 부다페스트로 출발하는 항공편으로 변경하였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 계획이 성공했을까? 물론 우리는 알 수 없다.
세 번째로, 짐과의 끝없는 전쟁을 벌였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46kg의 수화물의 LOT를 포기하고 35kg의 카타르 항공을 선택했으나, 그 마저도 도하 여행이 무산되면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저 불확실한 계획으로 11kg의 짐을 공중으로 날려 보낸 것이다.
맥시멀리스트인 나에게 35kg를 맞추기란 정말 힘들었다. 처음에는 필기구와 공책과 같은 간단한 것들부터 빼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로는 잡다한 물건들은 하나씩 뺐고, 중복되는 약은 하나씩만 챙기는 것으로 다시 짐을 쌌다. 무게는 여전히 35kg를 초과하였고, 그때부터는 옷을 하나씩 빼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반쯤 울면서 챙겨놓은 한식과 밥솥을 빼고 나서야 나는 35kg를 맞출 수 있었다.
이렇게 적고 나니 별 어려움 없이 35kg를 맞춘 듯싶지만, 정말 아니었다. 굳이 이런 것까지 가져가야 하냐고 다 빼라는 아빠와 이건 꼭 가져가야 한다는 나의 기나긴 토론 끝에, 한식 없이 못 사는 내가 밥솥까지 포기하면서, 비행기를 타는 마지막 날까지 짐을 정리하다 못해 공항에 가서도 다시 캐리어를 열어서 옷을 뺐다. 정말 지긋지긋한 짐과의 전쟁이었다.
#4. 교환학생 가기 전, 어떤 마음이었나요?
나는 정말 내가 그렇게 울 줄 몰랐다.
집에서부터 인천공항까지 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눈물이 차올라서 혼자서 삼키느라 애를 썼다. 체크인을 하고 티켓을 받고서,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부모님 앞에서 정말 펑펑 울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도 기숙사 생활을 했고, 대학에 와서도 기숙사와 셰어하우스, 자취를 병행했었기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혼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혼자서 아프고 힘든 일을 견디는 일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5년간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교환학생 역시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출국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내가 느낀 감정은 완전히 달랐다.
그전에는 비록 내가 가족들과 같은 도시에 있지는 않지만,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올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게 1시간이었을 때도, 4시간이었을 때도 있었지만 우린 같은 나라에 살고 있었고,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교환학생은 다르다. 무려 7시간이라는 시차가 있고, 직항 항공편으로 11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한국에 있는 부모님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내가 힘들 때 바로 전화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힘들다고 이야기해도 달려와줄 수도 없다. 그곳에서는 정말 내가 한 명의 어른으로서, 하나의 개체로서 나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감정들이 너무 무서웠던 것 같다. 20살이 넘은 법적인 성인이지만 스스로가 성인이라고 느끼는 상황은 술을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다는 것이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 밖에 없었다. 그동안은 나에 대한 책임을 부모님께 조금 미뤄두었는데, 교환학생을 감으로써 그 모든 책임들이 나에게로 와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하니 갑자기 다가올 교환학생 생활이 무섭기만 했다. 영어를 완전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성이 뛰어난 것도 아닌 내가 무슨 배짱으로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다짐했는지 원망스럽기까지도 했다.
친구들을 두고 떠나는 것 역시 두려웠다. 나는 누군가와 오랫동안 연락을 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이라,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연락 길게 주고받지 않는다. 이런 나의 성향을 이해해 주고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하는 친구들도 있는 반면, 이로 인해 놓쳐버린 친구들도 많다. 이런 나의 성향을 알기 때문에 6개월 혹은 그 이상 동안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이 친구들과 영영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다들 나는 어디서든 잘할 거라고, 그런 사람이라고 응원해 주었지만 사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도 좋은 사람도 괜찮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들을 외국에서 내가 마주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내가 내 스스로의 새로운 모습을 찾았을 때, 그 모습에 실망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나는 당장 1시간 반 후에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이제 더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10분 넘게 펑펑 운 후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출국장에 들어섰다. 출국장에서는 친구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시간을 보낸 뒤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에 탑승하던 그 순간까지 정말 내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교환학생에 대한 나의 로망이 현실과 다르면 어떡하지, 생각한만큼 행복하거나 즐겁지 않으면 어떡하지 등등 수도 없는 질문들이 내 머리속에 가득하였다.
하지만 비행기가 이륙하며 엔진 소리에 뒤덮인 채 몸이 뒤로 젖혀지며 비행기가 이륙했음을 느끼는 그 순간, 그 모든 걱정들은 다 땅에 두고 나만 하늘로 떠오른 듯했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수많은 고민과 불안, 걱정들이 모두 기대와 설렘으로 바뀌었다.
그 속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교환학생이라는 블랙홀 속에, 나는 기대와 설렘을 안고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