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속리산 자락이 한결 고요해지는 이른 아침, 짙은 안개 사이로 고찰의 지붕선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종소리는 멀리서 들려오지만 마음에는 또렷이 닿는다.
이곳에서는 세월의 흐름이 잠시 멈춘 듯하다. 오래된 돌계단에 내려앉은 낙엽, 바람결에 흩어지는 향 냄새, 그리고 묵직한 청동빛 불상이 전하는 침묵의 무게.
천년을 이어온 절집은 그저 한 장의 풍경이 아니라, 한 시대의 숨결을 품은 공간이다. 그렇게 속리산 깊은 품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법’이 머물렀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법주사는 ‘부처님의 법이 머문 절’이라는 뜻처럼, 오랜 세월 동안 신앙과 역사의 중심으로 자리해왔다. 신라 진흥왕 14년, 의신조사가 창건한 뒤 여러 차례의 중창과 재건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고려시대에는 공민왕이 들렀고, 조선 태조는 즉위 전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전한다. 세조 또한 병을 고치기 위해 복천암에서 기도를 올렸던 기록이 남아 있다.
사찰은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지만, 인조 2년에 벽암스님이 다시 중창하였다. 그 뒤로도 수많은 중수 과정을 거쳐 현재의 위용을 갖췄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용화전, 원통보전, 명부전 등 전각이 정연히 배치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는 법주사의 상징인 팔상전이 우뚝 서 있다.
팔상전은 국내에서 유일한 5층 목탑으로,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가 내부에 봉안되어 있다.
높이 22미터가 넘는 이 건물은 한국 목조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국보이자,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목탑이다. 한 여행객은 “듣기만 하던 팔상전을 실제로 보니 훨씬 장엄했다”고 감탄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법주사는 속리산 일대 문화재의 절반 이상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사찰 안에는 국보 세 점이 남아 있다.
팔상전 외에도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석연지’와, 두 마리 사자가 몸을 맞대고 석등을 받치고 있는 ‘쌍사자 석등’이 그것이다.
석연지는 연꽃이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조각미로 찬사를 받으며, 쌍사자 석등은 신라 석등의 전형을 깨고 독창적인 형식을 선보인 작품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이 외에도 천왕문, 능인전, 원통보전 등 주요 전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최근에는 청동 미륵대불이 세워져 사찰의 또 다른 상징으로 자리했다.
높이 3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은 속리산 자락 어디서든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법주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중 하나다. 천년 넘게 이어진 불교 신앙과 산중 수행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단순한 종교적 공간을 넘어, 한국 정신문화의 깊이가 응축되어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법주사는 천년의 역사를 품고 있으면서도, 현대인에게는 쉼의 공간으로 다시 다가서고 있다. 사찰에서는 ‘다 잘 될 거야’라는 이름의 템플스테이를 운영한다.
단 하루 머무는 당일형부터 1박 2일 체험형, 휴식형까지 다양하다. 일상에서 벗어나 산사의 고요 속에 머물다 보면, 자신을 위로하고 재정비하는 시간을 얻는다.
템플스테이는 20명 이상 단체만 참여 가능한 당일형을 포함해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절의 하루는 새벽 예불로 시작해 차담과 참선으로 이어진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이곳의 맑은 공기와 고요한 시간은 무엇보다 큰 선물이다.
최근에는 법주사 성보박물관이 개관해 불화와 유물 전시를 감상할 수 있으며, 사찰 인근의 속리산 세조길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계곡의 물소리와 숲 내음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한 방문객은 “40년 만에 다시 찾은 법주사에서 속리산의 푸른 기운을 느꼈다”며 감동을 전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법주사로 향하는 길목은 이미 여행의 일부다. 속리산 세조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계곡물의 청량한 소리와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 향이 자연의 위로처럼 다가온다.
경사가 완만해 남녀노소 누구나 편히 걸을 수 있으며, 천왕문을 지나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전각들은 하나의 긴 불교 미학의 선을 그린다.
조용히 고개를 들면, 청동빛 미륵대불이 하늘과 맞닿은 듯 서 있다. 천년의 시간 동안 법이 머물렀던 이곳, 법주사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평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번 가을, 유네스코의 숨결이 깃든 속리산 법주사에서 오래된 고요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