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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혜원 Feb 26. 2022

아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안나이야기

 안나는 지각을 자주 하는 여학생이 이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어릴 때 집을 떠났다고 했다. 아빠는 가정에 대해 책임의식이 없는 건 고사하고 세 아이가 자신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살림을 도맡아 하는 그 아이가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 등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엉덩이를 매몰차게 때리며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면 이 매의 아픔을 되새겨서 일어나라고 했었다. 성적은 아예 접어두고 두 오빠처럼 중학교 졸업을 못 하는 상황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랬다. 다행히 무단으로 결석을 하거나 지각을 하는 일 없이 2학년을 마쳤다. 그리고, 다음 해 3월 3학년으로 진학한 지 며칠 만에 암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나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고등학고 진학을 하지 못하고 같이 중학교 3학년으로 다니는 오빠가 학교도 안 가고 며칠째 여동생을 간호하고 있었다. 무릎 관절에 암세포가 있는 안나는 다리에 깁스하고 피를 뽑아내는 호스를 달고 있었다. 완전한 수술이 아니라 수술 부위를 잘 보기 위한 수술을 한 거라고 했다. 담당 의사는 바쁘다고 해서 볼 수가 없었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더 입원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걱정만 앞섰다. 

 고등학생 나이인 큰 오빠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어오는 돈과 국가에서 보조받는 것으로 가계를 꾸리는 형편이라 병원비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행히 복지사가 애를 써줘서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3학년 담임선생님이 여러 방면으로 도움의 손길을 알아보고 있다고 해서 그 선생님의 행보에 감동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열악한 환경에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던 어린 소녀가 지독한 병을 얻은 것으로 신을 원망하고 싶은 분노와 백방으로 도와주려는 따뜻한 마음이 섞여 있는 현실이. 7인실의 병실엔 모두 할머니들이셔서 환자나 보호자들도 많이 신경 써주시는 것 같았다. 옆 침대의 아주머니는 아이가 없어서 그런지 자기 딸 삼았으면 좋겠다며 애정을 보이셔서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녀석들도 그런 보살핌이 고마웠는지 내가 사간 치킨을 나누는 모습에서 어려움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애가 느껴졌다. 공부 지지리 안 하고 지각, 결석 많이 하던 오빠 녀석을 대견하게 바라보다 돌아왔다. (안나 오빠는 그 병실의 대표 간병인이란다. 병실 안에서 각종 심부름은 다 한다고 했다.)


 ‘스승의 날’이다. 학생들이 정성껏 담임선생님들을 위해 작은 파티를 여는 것으로 보아 아주 잊힌 날은 아닌 듯하다. 두 달째 병상에 있는 안나는 카네이션 한 송이와 함께 다리를 절단했다는 소식을 보냈다. 경과를 보기 위한 1차 수술은 뭐고, 2차에 걸친 항암치료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었단 말인가!  열여섯 살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현실 아니 사실이다. 병원 진료도 너무 늦은 것이 절단의 가장 큰 이유였고, 치료과정도 순탄하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워 더 속이 탔다. 연락 끊긴 엄마라도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다. 안나를 제대로 돌봐주고, 위로해 주고, 안나가 마음 기댈 수 있는 엄마가....

 안나 담임선생님과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내 팔목만 한 번 힘껏 잡아주었고, 그 힘에 난 눈물을 꿀꺽 삼켰다. 


 월요일 퇴근 후 안나에게 갔다. 같이 간 동료는 PMP에 영화와  TV 프로그램까지 다운받아서 준비를 했다.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인가보다. 매주 병문안을 가는 동료 앞에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아이보다 내가 먼저 눈물을 쏟을 것 같아 마음을 굳게 먹고 갔는데 환자 본인이 아직 어린 나이이건만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절단을 통보받았을 때 많이 울었고, 수술 후엔 울지 않았다는 안나의 얘기가 오히려 더 목이 메었다. 절단하지 않으면 다리 위 몸쪽으로 암세포가 더 전이된다는 의사의 치료 선택을 안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절단한 지 겨우 1주일 지났는데 벌써 목발까지 짚으면서 다닐 수 있다고 했다. 휠체어도 혼자 탈 수 있다고 해서 많이 놀랐다.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해결하며 살아온 흔적일까, 생존본능의 발로일까 싶어서 또 짠했다.

 무릎과 넓적다리의 중간쯤을 절단한 다리는 똑바로 누우면 위로 들려서 엎드려 잔다고 했다. 아직 신경세포가 남아있어서 발가락이 움직이고, 무릎이 가려운 걸 느낀다고 한다. 하드웨어가 없음에도 저장되어있는 소프트웨어는 무릎 위치의 침대 바닥을 긁게 하는 명령을 내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신체의 신비로움에 경이를 느껴야 하는 건지, 웃지 못 할 현실에 서러워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두런두런 얘기하는 아이의 눈에 서려 있는 외로움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밤길은 심란함과 슬픔이 깔려 있었다.


새해를 맞아 10일이 지났다. 지난 일요일에 쓰러져서 입원했는데 치료를 중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날 아침 휴대폰의 문자 알림 음이 나를 깨웠다. 안나가 위독하다고. 임종을 같이해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안나의 담임선생님과 안나 오빠의 담임선생님 두 분이 먼저 와 계셨다. 두 오빠와 이모라고 부르며 가까이 지내는 이웃 분이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빠는 복도에 계시다는데 볼 수 없었다. 한참 후엔 의사와 싸우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딸을 잃는다는 억울함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지 않는 그 아빠에게 늘 그랬듯이 나는 여전히 화가 났다. 

 잠들 듯 편히 눈감지 못하고 세 시간이 넘도록 멈추지 않는 산소호흡기 안의 들숨과 날숨은 애처로운 불협화음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이의 두 손과 하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이들에게 안나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하자고 했다. 눈도 맞추지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귀는 열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 선생님이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 그 선생님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기도를 마치는데 나는 울음이 나오면 목이 매여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말을 잇지 못한다. 겨우 겨우 편히 가라는 말만 하고나서 눈물을 꺼억꺼억 삼키며 얘기 했다.

“안나야! 너 엄마가 곁에 없어서 눈 감지 못하는 거니? 어딘가에서 분명 엄마도 너의 아픔을 느끼고 계실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여기 있는 우리들의 사랑으로 제발 편히 눈 감아라.”

기계에 있는 숫자가 점점 내려가고 아이의 고모가 오셔서 끌어안고 오열하는 가운데 기계의 숫자는 0이 되고, 파장이 있던 선은 일직선이 되었다.


엄마 없이 16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아이의 삶 앞에서 숙연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오전 내내 팽팽하던 긴장은 슬픔과 함께 두통을 몰고 왔다. 슬픔의 피도가 아무리 높고 거세도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여전히 쉬지 않고 돌아갔다. 그런 사실조차 안나에게 미안했다.어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책 속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음 한 귀퉁이에 엄마의 따스함을 남겨달라고 했던 어린 안나가 이 세상보다 더 좋은 곳에서 편히 지내길 바라며, 그러리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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