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그림
남자들의 축구사랑은 한결같다. 오죽하면 남자들 대화 소재로 빠지지 않는 것이 군대 다음으로 축구일까! 우리 아들 역시 초등학교 2학년부터 시작 된 축구사랑이 2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요즘도 몇 년 전 들어간 조기축구회에서 일요일마다 축구를 한다. 아들 못지않게 운동을 좋아하는 남편은 자신도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지라 아들이 축구하러 갈 때마다 ‘아빠도 붙여주라!’며 빈말처럼 졸랐다. 수비수인 아들이 축구를 끝내고 들어올 때마다 첫 마디가
“골 넣었냐?”였다.
아들의 ‘아니’라는 답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골도 못 넣으면서 축구를 왜 하냐?”라며 시샘 같은 시비를 걸었다.
그러던 남편이 드디어 조기축구회에 가입했다. 첫날은 아들이 신던 축구화와 옷 등을 챙겨서 갔다. 나이도 그렇고 오랜만에 뛰어서 힘들 텐데, 넘어져서 생긴 무릎의 상처조차 훈장처럼 여기며 만족스러워 했다.
아들의 축구화가 낡았다며 새로 사야겠다고 하는 말에 인터넷 쇼핑몰의 사이트에 접속한 건 나였다. 아들도 아빠의 축구 시작을 축하하며 선물을 하겠다고 거들었다. 아들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축구화와 장갑, 비니까지 주문을 하고 결제했다. 남편은 소파에 편히 누워서 TV를 시청하고 아들과 내가 찾고, 고르며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손 안대고 코풀며 쉽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아이들까지 아빠 일을 나서서 돕고 같이 해결하려고 하는 그림으로 살고 있으니 얄밉기까지 했다.
남편의 취미생활은 지나칠 정도다. 일주일에 두 번은 당구모임에 가고, 낚시에 골프까지 즐긴다. 이제 일요일마다 축구까지 시작했으니 나는 취미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되었다. 내가 알아서 다 하고, 남편 뒤치다꺼리 다 해주면서 사는 우리 비대칭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돌이켜 보니 남편 때문이 아니라 내 탓이다. 나를 잘 아는 오랜 친구가 일을 잘 떠맡는 내게 ‘제발 네가 하겠다는 말 좀 먼저 하지마라.’라는 우정 어린 조언을 했었다.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나에게 일의 추이를 보며 기다릴 줄 모르고 먼저 제안하고 나서는 성향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남편이 처음 골프를 배우기 시작할 때도 골프채를 선물하겠다고 내가 먼저 자원했다. 가정의 대소사에서 생기는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자면 끝이 없고, 특별히 남편이 기획하는 여행을 못 해본 게 늘 불만인데 그것 역시 남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내가 먼저 여행지며 일정을 제안 해왔다. 남편은 구지 능동적으로 하지 않아도 잘 살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있다면 타인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의 밑그림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 그려 놓는다. 우리는 흔히들 말하는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 같이 산다.’는 중년 부부다. 문득 깨달은 오늘의 생각이 30년 동안 그려 온 우리 관계의 그림에서 불만 한 꺼풀 걷어내고, 그 곳에 분홍색으로 하트를 그려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