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 리뷰
오프닝
한 여자가 군인들에게 취조를 받고 있습니다. 신분을 증명하라고 군인들은 그녀를 닦달합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네요.
화면이 전환되고 어두컴컴한 화면이 이어집니다. 간간히 새어들어오는 창문의 빛. 남자는 불안하게 어딘가를 향해 걸어갑니다. 문이 열리고 화면에 환한 빛으로 가득합니다. 어딜까요, 미국입니다.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거든요. 그런데 카메라는 자유의 여신상을 거꾸로 담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도착의 수수께끼
라즐로는 유대인입니다. 다른 수용소로 보내져 아내와 조카와 헤어졌다가 운좋게 이민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죠. 필라델피아에 사는 사촌의 집에 의탁해 살면서 미국에서의 첫 발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사촌이 하는 가구점 일을 도우며 살다가 어느 한 부자의 의뢰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의 서재를 리모델링 하달라는 의뢰였죠. 라즐로는 전쟁 전, 꽤 유명한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의뢰를 수락하고 서재를 멋지게 리모델링하죠. 그러나 집주인인 의뢰인의 아버지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돈은 줄 수 없다고 호통을 치며 그를 내쫓습니다. 설상가상 사촌의 아내가 라즐로가 자신에게 추근댔다며 누명을 씌우고 그를 집에서 쫓아냅니다. 그는 부랑자 신세가 됩니다.
3년 후, 그의 앞에 누군가가 찾아옵니다. 그에게 호통을 쳤던 그 사업가입니다. 라즐로가 리모델링한 서재가 유명해지며 덩달아 그 남자의 평판도 함께 올라간 모양입니다. 뒤늦은 감사인사를 하며 남자는 라즐로를 자신의 집에 초대합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밴 뷰런입니다.
브루탈리즘
브루탈리스트라는 제목은 브루탈리즘 건축 양식을 추구하는 건축가 라즐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콘크리트를 적극 활용하여 기능성과 실용성을 극한으로 추구하는 건축 양식이 바로 브루탈리즘입니다.
영화는 라즐로가 밴 뷰런의 눈에 들어 그의 건축 프로젝트를 도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밴 뷰런이 의뢰한 거대한 복합 문화 공간을 건설하는 것이 영화의 주요 골자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건축가의 일대기를 다루는 영화가 아닙니다. 라즐로가 유대인이라고 말씀드렸죠?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넘어온 유대인들의 삶. 그것이 <브루탈리스트> 가장 중요한 중심입니다.
강자와 약자
당시 미국사회엔 이민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경계와 차별의식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사업가 밴 뷰런과 그의 아들 해리가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영화는 미국인들을 강자, 그리고 유대인들을 약자의 위치로 묘사합니다. 밴 뷰런은 라즐로에게 잘해주는 척하지만 은연 중에 무례한 짓을 범합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라즐로의 아내 애르제벳은 밴 뷰런의 차를 얻어 타고 심지어 일자리까지 제공받습니다.
전쟁 트라우마로 실어증에 빠진 라즐로의 조카 조피아는 해리에게 성희롱을 당합니다. 영화는 노골적이진 않지만 아주 잔잔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위치 관계를 조명합니다.
다만 너무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진 않습니다. 착한 미국인들도 있거든요. 밴 뷰런의 딸, 그리고 변호사의 존재가 이 균형을 맞춥니다. 다만 유대인의 위치가 미국인보다 높아지는 순간은 영화 내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친절은 ‘동정’에 가깝기 때문이죠.
변하지 않는 것
밴 뷰런은 라즐로에게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을 딴 복합 문화 공간을 지어달라고 의뢰합니다. 효심이 깊어서일까요? 수완이 좋은 사업이기 때문일까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일까요? 모두 아닙니다. 그는 파티 자리에서 라즐로와 대화를 나눕니다. 거기서 라즐로는 자신이 건축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폭우와 홍수 탓에 강이 범람해 도시가 모두 잠겨도 내 건물은 남는것.
밴 뷰런은 이에 크게 감명받죠. 그는 명예욕이 큰 인간입니다. 매몰차게 내쳤던 라즐로를 다시 찾아간 것도 그가 리모델링한 서재가 유명해져 자신의 명성이 올라간 것에 대한 감사였죠. 그가 건물을 짓기로 마음 먹은 건 ‘명예’ 때문입니다. 강이 범람해도 굳건히 뿌리박고 남아, 사라지지 않을 자신의 가치를 건물의 형태로 남기고 싶었던 거죠. 수영장도 만들자는 라즐로의 말에 ‘나는 수영을 못한다’며 매몰차게 거절한 것도 이에 대한 반증입니다. 그는 이미 그 건물을 모두의 공간이 아닌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빛과 어둠
오프닝을 다시 봅시다. 라즐로는 어두운 이민선의 계단을 걸어갑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창문의 희미한 빛이 불안한 그의 얼굴을 비추죠. 그리곤 밖에 나온 순간 탁 트인 빛이 그를 맞이합니다. 그의 인생, 그리고 영화 전체를 요약하는 훌륭한 오프닝입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전진하는 인물입니다. 사촌 아틸라의 쪽방에서 살 때도, 건설 현장 숙소에서 살 때도, 그리고 그가 수용소에 갇혀있을 때도, 어둠 속에 있는 그를 희미한 빛이 비춥니다.
욕망
밤은 욕망이 피어오르는 시간입니다. 밤만 되면 그는 욕망에 허덕이며 쾌락을 쫓습니다. 극중에선 그를 ‘자제력이 부족하다’라는 표현으로 서술합니다.
빛을 쫓는 자이기에 억눌린 욕망이 어둠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죠. 매춘부를 찾아갔을 때도, 마약을 할 때도,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다가 얻어 맞을 때도 그는 항상 어둠 속에 있습니다.
아내인 에르제뱃과 재회하고 첫날 밤, 그는 그녀에게 강제로 애무당합니다. ‘다 알고 있다’는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그는 어둠 속에서 억눌린 욕망을 해방하지만 그마저도 그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겁니다. 그는 자유의 추종자이자 욕망의 노예입니다.
추락
라즐로와 밴 뷰런은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제단에 쓰일 대리석을 구하러 함께 이탈리아 채석장으로 갑니다. 신비한 하얀빛이 감도는 아름답고 채석장에선 신성함마저 느껴집니다. 밴 뷰런은 감탄하며 대리석에 자신의 뺨을 부빕니다.
밤이 되고 채석장 안쪽 동굴에서 작은 파티가 열립니다. 라즐로는 또 술에 잔뜩 취하고 한 여성의 유혹까지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거절합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합니다. 그리곤 밴 뷰런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밴 뷰런의 강간은 그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라즐로를 강간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너는 그냥 창녀야.
영화 전반적으로 은연중에 깔려있던 라즐로를 향한 동경과 무시. 그 열등감이 폭발하여 그를 힘으로 제압하는 장면이죠. 동시에 밴 뷰런이라는 인물이 완전히 추락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창문의 안과 밖
다음날, 밴 뷰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채석장에서 나옵니다. 라즐로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뒤따라 나오다가 채석장 벽면에 뚫려있는 직사각형 동굴을 봅니다. 하얗고 신비한 벽면 너머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이 스멀거리는 동굴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동굴은 라즐로가 맞이했던 ‘희미한 빛’을 역전시킨 장면입니다. 그는 항상 어둠 속에 갇혀 작고 네모난 창으로 비추는 작은 빛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인물이었습니다. 수용소에 있었을 때처럼요.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빛의 위치에 서서 과거에 자신이 존재하는 어둠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느낀 겁니다.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이곳 역시 크게 나을 곳이 없는 거라는 걸. 그의 복잡한 표정을 통해 설명해줍니다. 상상 이상으로 험난한 이민자의 삶을 말이죠.
정육면체
라즐로는 밴 뷰런애게 자신이 건축가가 된 이유를 설명하며 이런 비유를 듭니다.
정육면체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육면체를 직접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건축은 증명입니다. 천 마디 말보다 자신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겁니다. 위에서 건축의 ‘불변성’의 가치에 대해 말했죠. 밴 뷰런은 그것을 단순히 실체화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의 명예욕을 채우려 했지만 실은 라즐로에게 그 작업은 더욱 높은 곳을 바라보는 숭고한 작업이었습니다.
그 건물을 완성하는 과정은 그에게 있어 정육면체를 만드는 행위와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오브제. 그는 자신의 삶 자체를 승화시켜 스스로의 성을 쌓은 겁니다. 어둠 속에서 항상 갈망했던 작은 희망의 빛 한줄기를 떠올리면서요.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바탕이 되는, 무너져선 안되는 가장 원론적인 본질을 말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밴 뷰런의 본질은 ‘명예’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추락하죠. 자수성가 했음에도 그는 한낱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추락합니다. 가장 불명예스러운 짓을 저지름으로서요. 그의 견고한 본질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의 앞에서 밝혀지게 된 순간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것이 해리슨 밴 뷰런이라는 남자의 삶이었습니다.
라즐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삶 그 자체인 그 건물입니다. 그 건물이야말로 그가 추구한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인 겁니다. 폭우와 홍수에 도시가 물에 잠겨도 남아있을 영원의 공간인 거죠.
2막의 마지막, 밴 뷰런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그를 찾아 건물로 향합니다. 콘크리트로 쌓아올려진 라즐로의 거대한 성전에서 사람들은 어둠을 목도하고 희미한 빛을 좇아 밴 뷰런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마주한 건 건물의 심장부에 놓여진 대리석 재단 하나, 그곳에 맺힌 작은 빛의 십자가였습니다.
처음 그가 설계한 집을 사람들에게 선보일 때, 빛을 이용해 재단에 십자가 모양의 빛을 고이게 하는 기능을 작은 미니어처로 시연합니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빛이 십자가 모양으로 맺히는걸 보여주지 않고 인물들의 감탄하는 반응만 담습니다. 그리곤 의도적으로 숨긴 그 중요한 장면을 클라이막스에서 보여주어 그 감동을 더했습니다.
라즐로는 유대인입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지만 마을 이사회의 승인을 받기 위한 이해관계가 얽혀 가톨릭 신도들을 위한 예배당을 건물 안에 지어야 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장면은 그에게 있어 ‘빛’이 종교관을 넘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거대한 어둠, 그리고 가장 깊은 안쪽에 맺힌 작은 빛의 십자가 하나. 그에게 있어 빛은 구원이었습니다. 카메라는 십자가를 보여주곤 다시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 빛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라즐로는 어둠속에서 항상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 카메라로 관객들의 시선을 조종해 보여줍니다.
그 작은 빛을 쫓는 것이 그의 인생이었고, 그 삶을 지탱하는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이었습니다.
계승
이미 훌륭하게 완성된 영화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에필로그에선 오랜 시간이 흐르고 라즐로가 지은 그 건축물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 휠체어에 앉아 말도 제대로 못하지만 그의 조카 조피아가 훌륭하게 그를 대변하여 연설을 합니다.
이 에필로그가 흥미로운 점은 라즐로가 자신의 가족의 결점들을 모두 계승했다는 점입니다. 아내처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중반까지의 조피아처럼 말을 못하게 되죠. 이 두가지 결점들은 이민자로서 유대인이 겪은 대우와 고통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며 위치의 차이를 보여주는 장치라고 했었죠? 그런데 왜 그것이 라즐로에게 계승된 것일까요?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
라즐로는 건물을 완성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결시켰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어땠나요? 그는 강간을 당했지만 그 어디에도 말 못하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언어를 착취당한 셈이죠. 마치 조피아처럼.
그리고 2막의 끝에 밴 뷰런의 저택을 찾아가 그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 건 두 다리가 멀쩡한 라즐로가 아니라 다리를 못움직이는 에르재뱃이었습니다. 그녀는 목발을 짚고 비틀거리면서도 용감하게 할 말을 모두 쏟아냅니다. 하지만 라즐로는 그곳에 직접 찾아갈 수 없었습니다. 다리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맞습니다. 말미에 그의 모습은 끝까지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려 했던 불쌍한 예술가의 말로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민자로서 철저하게 유린당했던 아픈 상처들을 신체적 결함으로 치환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죠. 이민자들은 목소리를 잃고 두 다리를 잃은 것과 다름 없는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오프닝과 연결되는 마지막 대사는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
이 말대로라면 라즐로의 삶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 걸까요? 건축가로서 명예를 인정받고 지난 삶의 고통을 위로받았으니 행복한 인생이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그 아픔의 흉터들을 지닌채 살아가야하는 불운한 인생일까요??
에필로그는 마치 실제 현장을 촬영한 것 같은 페이크 다큐의 형식으로 촬영되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일까요? 감독이 영화의 정서를 현실로 소환한다는 이야기겠죠. 감독은 처연한 유대인 건축가의 삶을 그리는 것에 모자라 그 날카로운 손가락을 화면 밖으로 들이댑니다. 그리곤 관객에게 묻는 겁니다.
당신은 그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프닝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엔딩의 장면은 마치 감독이 구조 안에 관객들을 가두고 끝없는 물음을 던지는 걸로도 보입니다. 견고한 하나의 건축물처럼, 이 영화의 구조는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마무리
무서울 정도로 잘 만든 영화입니다. 3시간 30분이라는 상영 시간이 무색하게 흥미롭게 극을 전개하는 이야기 방식도 훌륭하고, 구성과 비유는 물론이요, 배우들의 연기까지 삼위일체로 맞아 떨어지는 훌륭한 영화입니다. 티모시 샬라메는 상복이 없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이번 오스카는 에드리언 브로디의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원래 저는 영화가 2시간 30분을 넘으면 다큐로 치는데 이번 한 번만 봐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