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폴리 아 되> 리뷰
시대의 흐름
지금 이 영화가 굉장히 뜨거운 감자죠. 대단한 완성도의 1편을 등에 업고 나온 속편. 그야말로 천룡인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재미있을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굉장히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가 개봉하면 적어도 이틀 안에 보고 옵니다. 베테랑 2도 초고를 한참 전에 써놨는데 결국 못 올렸습니다. 퇴고하기 귀찮았거든요. 데헷. 하지만 이 영화는 다릅니다. 떡밥이 잔뜩 불타고 있는 지금 시대의 흐름을 타야 합니다. 조회수 떡상 한번 가보자고!
아래 리뷰에는 <조커: 폴리 아 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미
조커와 할리퀸. 이미 재미가 보장된 조합입니다. 김밥으로 치면 참치랑 마요네즈 정도 되겠네요. 하지만 이 영화는 재미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락적 재미‘가 많이 부족하죠. 부족한 게 아니라 거의 없는 수준입니다. 이 영화는 라라랜드의 탈을 쓴 법정물이자, 법정물의 탈을 쓴 휴먼 드라마입니다.
영화의 가장 변곡점이 된 조커의 변호 장면을 제외하면 전편 만한 짜릿함은 전무합니다. 법정이 터졌을 때 큰 거 오나 싶었지만 거기서 한번 더 누르더군요. 감독이 많은 걸 내려놨습니다. 전작이 R등급 최초로 월드와이드 10억 달러를 돌파해서 부담이 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죠.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올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라라랜드?
뮤지컬 영화가 될 거라는 감독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건 기대가 있을 갑니다. 가장 많은 이들이 바란 건 ‘어둠의 라라랜드‘같은 분위기였겠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 뮤지컬이란 요소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본작에서 노래는 쾌감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노래가 좋다거나, 안무나 미장센이 너무 멋지다거나, 가사가 훌륭하여 마음을 절절하게 울린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이 영화에서 노래란 ‘소음‘에 가깝습니다. 멜로디가 다양하지도 않고, 가사는 비슷하게 반복되는 경우기 많습니다. 또한 배우가 노래 실력을 뽐낼 수 있다기보다는 그저 선율을 따라 흥얼거린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로 카타르시스가 절제되어 있습니다. 의도적인 연출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속성들이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의 이 ‘특징’과 굉장히 닮아있기 때문이죠.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
주인공은 아서 플렉에겐 병이 있습니다. 바로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이죠. 이 장애 덕에 그는 전혀 웃긴 상황이 아님에도 배가 찢어지게 웃어 타인의 공포를 삽니다. 그가 사회에서 도태되는데 기여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죠. 이 영화에서 ‘노래’란 ’ 상황에 맞지 않게 터져 나오는 웃음’입니다. 그것은 어쩔 땐 소음처럼 기분 나쁘게 맴돌다가도 아서의 내면으로 빨려 들어가게 했다가, 갑자기 밖으로 의식을 튕겨내어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 불쌍한 남자를 뜯어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느낀 불쾌감은 어찌 보면 감독의 의도였을지도 모릅니다.
웃음
아서가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많이 없습니다. 법정으로 향하는 호송차 안에서는 오히려 웃음을 제어하며 자연스레 웃는 법을 연구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이제 웃음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간수들은 그의 농담을 재밌어하며 기다리기까지 합니다. 그가 진짜로 ‘조커‘가 되었기 때문이겠죠. 바로 이 부분이 영화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겁니다. 자세한 건 끝부분에 설명드리도록 하죠.
비와 담배 연기
비는 아래로 향하는 이미지입니다. 죄수들이 오줌통에서 쏟아버린 더러운 오물과 함께 뒤섞여 깊은 하수구로 침잠합니다. 아서가 추락하는 장면에는 항상 비가 내렸습니다.
반대로 담배 연기는 위로 상승하는 이미지입니다. 아서가 담배를 물고 있던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목소리엔 힘이 넘치고 발걸음은 위풍당당해집니다. 조커 분장이 아니라 담배 연기와 함께일 때 아서의 위치는 상승합니다. 아서를 상징하는 비와 대구 되는 담배 연기는 명백한 조커의 이미지입니다. 마지막 변론 이후 조커 분장을 지우는 건 공교롭게도 ’ 물’이었습니다. 비는 아니지만 속성이 비슷하죠. 느낌 알잖아요?
호아킨 피닉스
이 대목에서 그의 연기에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기아 같은 몸은 어떻게 만드는 건지, 그것조차 몸을 사용한 연기의 일부였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어떻게 사람 몸이 그래요? 그리고 담배를 피울 때마다 연기처럼 일렁거리며 날아갈 듯한 그 동작들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우아하고 숭고함마저 느껴집니다.
조커와 아서 플렉을 연기할 때도 대단합니다. 목소리의 톤이나 표정, 심지어 주름의 모양까지 바뀌는 것 같습니다. 조커가 되면 신체는 크기 자체가 커지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눈빛과 목소리는 또 어떻고요. 바람 빠지는 풍선이 비명을 지르면 저런 소리가 나겠다 싶은 섬뜩한 웃음소리는 정말 일품입니다. 그의 다른 영화에서 이런 소리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조커가 되어 비릿하게 웃을 때는 내 몸 마저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 그냥 미친 사람입니다. 영화보다 위대한 배우가 있다면 그건 분명 호아킨 피닉스일 겁니다.
아서에서 조커로, 조커에서 아서로
1편은 아서 플렉이 조커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대로 본 작은 조커가 된 아서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전작 오프닝 기억나십니까. 삐에로 분장을 한 아서가 쫓기면서 고담 시내를 달립니다. 이번 영화에선 반대로 재현되었습니다. 말미에 법정에서 탈출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쫓길 때, 그는 다시 고담 시의 도로를 가로질러 도망칩니다. 그때는 넘어지고 나서 조커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인간으로 남기 위해 도망칩니다. 혹은 달려갑니다. 개리가 유일하게 기억해 준, 좁쌀만큼이라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자신의 남루한 인간성을 쫓아 달립니다. 그리고 그 증명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가 인간으로 남기 위해선 사랑의 증명이 필요했습니다.
할리 퀸
할리 퀸이 조커를 사랑하지 않는다? 저는 처음 봤습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는 할리 퀸을 조커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감독이 조커를 죽이기까지 합니다(물론 죽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만큼 충격적인 전개라는 이야기입니다. 할리 퀸은 조커가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그러니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은 그녀에게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조커는 무너졌고 할리 퀸은 존재 가치를 잃었습니다. 팬들은 당연히 분노하겠죠. 조커에게마저 암울한 현실을 깨닫고 싶지 않을 겁니다. 우리에게 조커란 세상을 향해 웃을 수 없는 농담을 던지고 휘젓고 전복시켜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죠.
자, 이제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줄기로 가봅시다.
웃어야 하는 남자
아서 플렉은 웃고 싶은 사람에게 웃기지 않은 농담을 합니다. 반대로 웃기지 않은 상황에선 혼자만 웃어야 합니다. 그의 웃음은 세상과 핀트가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커가 선사하는 웃음은 세상이 원하는 것입니다. 웃길 거리곤 하나 없는 암울한 세상을 그는 웃게 만듭니다. 피와 폭력, 그리고 결핍으로 빚은 값싼 농담으로요.
아서는 고담이 낳은 괴물입니다. 조커가 하는 농담이 아니면 아무도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죠. 비록 재미없는 농담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누군가를 웃게 만들고 싶다는 아서의 순수한 생각은 누구도 봐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개리만이 인간 아서의 따뜻함에 대해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뚤고 줄기는 굽어있는 그 못난 꽃이지만 그걸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었기에 아서는 조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웃음을 내내 통제해 오던 그가 처음으로 상황에 맞지 않게 웃었을 때 법정은 폭발하고 그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영화는 아서에게 아름다운 결말을 안겨주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존재를 증명받기 위해 찾아간 사랑의 대상은 결국 미치광이 조커의 추종자였을 뿐이었습니다. 전작에서 늘 힘겹게 올라가던 계단. 이제는 그 계단을 다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는 추락합니다.
조커에서 아서 플렉이 된 대가는 다시 ‘웃기 싫어도 웃어야 하는 남자‘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조커가 되기 싫어도 그는 조커가 돼야만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그를 기억합니다. 심지어, 우리들조차.
그렇게 이 불쌍한 사내는 잔인한 운명에 이기지 못하고 비루한 최후를 맞습니다. 또 다른 자신. 아니, 자신의 그림자를 탄생시키기 위한 제물로 바쳐집니다. 핏방울이 그의 주름을 타고 흘러 미소를 그립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웃어야 했습니다. 형편없는 농담이었는데 말이죠.
조커
우리는 조커의 캐릭터를 파괴시켰다며 영화에 야유를 보내고 있습니다. 작품의 부제인 폴리 아 되(Folie à deux)는 ‘공유정신병적 장애‘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은 할리 퀸과 조커를 추종하는 세력들,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을 이르는 말은 아닐까요?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가 알던 조커가 아니라 그저 조커라는 관념을 뒤집어써야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어떤 비루하고 가여운 남자의 이야기를 본 것이라고.
마무리
쓰다 보니 또 너무 감정적으로 호소한 것 같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제 생각을 한번 솔직하게 정리해 봤습니다. 캐릭터에 이렇게 깊게 몰입해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영화였습니다. 전편을 뛰어넘는다거나 못했다고 평가할 게 아니라 전편과 하나의 영화로 보였습니다. 제 리뷰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면 한번 더 관람해 보시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한번 더 볼 겁니다. 오리지널 티켓을 개봉 당일에 주는 줄 알았거든요. 하하. 여러분은 꼭 안내문을 꼼꼼히 읽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쓰다 보니 날짜가 바뀌었네요. 언제쯤 게으름 부리지 않고 제 때 글을 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