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돌아왔습니다. 정확히는 작년이 아니라 2019년에 왔었죠. 4년이라는 시간을 지겨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들 어차피 전작을 기억 못 하거든요.
덕분에 영화의 난이도는 한 층 더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려면 1개의 영화와 2개의 드라마를 봐야 합니다. 아무도 안 본 "미즈마블", 수작이었으나 본 사람도 내용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시간이 "완다비전" 그리고 여전히 아무도 기억 못 하는 "캡틴 마블"까지 말이죠. 1편은 "인피니티 워"와 "엔드 게임"의 다리에 놓여 곁다리 흥행에 성공했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스스로의 체급으로 싸워야 합니다. 위에 나열한 저 진입장벽들을 안고 말이죠.
2023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마블 영화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무기
위 설명대로 이 영화는 MCU 사상 최악의 조건으로 스타트를 끊은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같은 스타팅 멤버들 당연히 논외죠. 이제는 크로스오버라는 시스템이 관객들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유니버스의 세계관도 구축이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어벤져스"라는 골대만 바라보고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안 되죠. 그럼에도 이 영화는 여전히 불행합니다. 전 세계에 캡틴 마블이 최애 캐릭터인 사람 손 들라고 하면 몇 명이 손을 들까요? 이런 건 알아도 안 물어보는 게 예의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아주 강력한 무기 두 개를 쥐고 있었습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스위칭 액션
예고편을 보고 능력을 쓸 때마다 서로의 위치가 바뀐다는 설정에 흥미가 생기더군요. 아주 트릭키한 설정이라 액션만 잘 뽑는다면 재미는 그냥 보장이고, 그동안 팀플레이에 능숙치 못했던 캡틴 마블 서사에 풍부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사실 이거 보려고 극장에 간 겁니다. 스위칭 액션과 묵혀있던 4천 원 영화 할인쿠폰. 이 두 개가 저를 극장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어땠냐구요?
"ㅎ"
출처: 네이버 영화
고먐미
아직 실망하긴 이릅니다. 이 영화가 쥐고 있던 또 한 개의 무기가 있거든요? 서준이형이요? 아닙니다. 서준이형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전통의 강호, 바로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쓰는 건 사실 이거 진짜 반칙이거든요. 이 영화 제작비로 귀여운 고양이 쇼츠 하나 만들어서 올렸으면 조회수는 더 높았을 겁니다. 남은 제작비로 스탭들끼리 일주일 동안 소고기 회식 하고 각자 아반떼 한 대씩 나눠 타고 갔으면 개이득인데 말이죠. 마블이고 나발이고 귀여운 게 최고입니다.
놀랍게도 저는 지금 비꼬고 있는 게 아니라 칭찬을 하는 중입니다. 1시간 45분 동안 "메모리" 노래 틀어주던 약 5분 정도만 재밌었습니다. 이건 뭐 콩나물 대가리보다 더 수율이 안 좋네요. "이럴 거면 영화 제목을 '캣츠'로 짓지..."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출처: 네이버 영화
하지만 재미없었죠?
네. 위에 저 무기들을 가지고도 이 영화는 재밌지 못했습니다. 고양이는 귀여웠으니까 뺄까요? 고양이가 이렇게 사기입니다 여러분.
아무튼 이 영화는 참 재미없습니다. 제가 말을 곱게 안 해도 재미에 대한 기준은 정말 낮은 편입니다. 저는 1편도 '볼 당시에는' 그럭저럭 재밌게 봤거든요. 근데 이건 재미가 없습니다. 서사도, 비주얼도, 액션도, 캐릭터도 전부 별로입니다. 엉망이라는 표현조차 이제는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별로'입니다. 좋아하던 시리즈에 이런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애석합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캐릭터
쓰다 보니까 개빡쳐서 좀 더 말해야겠습니다. 어떻게 셋 중에 매력적인 캐릭터가 한 명도 없습니까? 이거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악역은 처음에 설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주정복이니 마니 하는 요즘 악역들의 고질병인 히틀러병에 걸리지 않고 자신의 별의 생존을 위해 자원을 약탈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요 영화를 다 봤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요. "다르-킨"이었나 '벤-또"였나 뭐 대충 이런 느낌입니다. 매력이 1도 없어요.
출처: 네이버 영화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미즈마블은 시빌 워의 스파이더맨과 같은 위치에 놓였습니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분위기를 조잘조잘거리는 하이틴 감성으로 환기시켜주는 게 그녀의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얘도 딱히 매력은 못 느꼈습니다. 드라마를 봤으면 달랐으려나요? 그런데 진짜 잘 만든 캐릭터였다면 제가 알아서 드라마를 찾아보고 싶게 만들었을 겁니다.
"캡틴 오 마이 캡틴"
이 대사도 스파이더맨이 칠 법한 대사잖아요. 영화 드립이잖아! 근데 왜 얘한테 시키냐 이 말입니다. 인싸 드립 따라 하려는 아싸 같잖아요! 얘한테서 내 모습이 보인다고! 경고한다. 아싸 괴롭히지 마라 마블 놈들아.
출처: 네이버 영화
물
이 영화에서 물을 담당하고 있는 모니카 램보입니다. 답을 알고 있죠. 뭐든 물어보면 다 알려줍니다. 이 현상은 왜 벌어진 거고, 악당 놈은 지금 어디에 있고 뭐 이런 거 다 알려줍니다. 23세기 빅스비 같은 느낌이랄까요.
관객들이 흥미를 느끼려면요 감각을 자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감동이든, 충격이든, 감탄이든, 경악이든 말이죠. 공포 영화는 아예 하나의 감각을 자극하는 게 장르인 영화들입니다. 그게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극이 있어야 일단 도파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 영화는 미음 같습니다. 같이 먹을 간장도 안주는 미음. 스트레스 없이, 생각 없이 푹푹 퍼먹기 좋고 소화도 잘됩니다. 대신 맛대가리가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도 없고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도 없습니다. 미술관의 오디오북처럼 하나하나 설명해 주니까요. 이럴 거면 차라리 나무위키를 보지 왜 영화를 보고 앉아있습니까? 치킨 반마리값 내고?
출처: 네이버 영화
위기?
사람들은 마블이 위기라고 말합니다. 근데 마블은 원래 이랬어요. 몇몇 영화들을 빼면 렌지에 넣고 돌려서 간편하게 데워먹는 레토르트 같은 영화들이 대다수입니다. 소화도 잘되고 적당히 맛도 좋은 영화들이요. 근데 다소 무게가 없어 보일 수 있는 이런 약점들을 영리하게 극복해 왔습니다. 팀업무비의 성공은 마블이 해낸 가장 큰 업적이자 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팀업을 해도 설레고 재밌지가 않으니 문제인 거죠. 마블을 앞으로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마블 영화 퀄리티의 위기가 아니라 전략의 위기입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서준이형
이 영화의 진정한 승리자는 다름 아닌 서준이 형입니다. 평생 술안주가 생겼으니까요. 그리고 후레쉬맨 악당 같은 쫄쫄이에 황금 잠자리 같은 걸 씌워놨는데 외모가 전혀 꿀리지 않습니다. 사실 내 인생이 더 레전드입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출처: 박서준과 '더 마블스' 어셈블! 영상 캡쳐
나는 아직 배고프다
우리는 어벤져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욕을 한다는 건 그만큼 애정도 있다는 뜻이겠죠. 얼마든지 영화를 봐줄 의향은 있으니까 부디 조금 더 다듬고, 신중하게 만들어서 관객들을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릴 테니 어서 로키 드라마 같은 것 좀 더 뽑아오란 말이다 이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