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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땅을 밟다...2.

by 김석철




중국인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만만디'를 꼽을 수 있다. 세상의 중심이라는 다소 국수주의 색깔이 강한 '중화'란 말은 일단 차치해 두자.
여유로움, 신중함의 의미인 '만만디'를, '게으름'과 등치 시키는 의도는 다분히 중국을 깔보거나 폄하시키려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보인다.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깔보며 '빵즈(가오리빵즈)'라고 지칭하는 것은, 우리가 일본인들을 '쪽바리' 또는 키가 작다는 의미로 '난쟁이 왜'자를 붙여 '왜놈'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빨리빨리가 생활화된 우리네 입장에서는, 중국인들의 느리고 여유로운 행동거지가 자칫 게으름으로 비칠 수도 있다.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낡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 시골 마을 구석구석을 하세월 하면서 그들만의 삶이 녹아있는 풍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눈치껏 이름 모를 음식을 먹고, 눅눅한 이불이 낯선 나그네를 옥죄는 허름한 빈관에서 몸을 뉘이고, 되지도 않는 한자를 더듬거리면서 손짓 발짓으로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순박하고 선한 인성의 현지인들은 늘 친절하고 따뜻했다.

출발할 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의 많은 주의와 경고를 들었기에 내심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겐 기우였다.

흑룡강 마적단의 습격, 삼합회 조폭단에게 납치 당해 쥐도 새도 모르게 암매장될 수도 있다는 등의 꽤나 진심 어린 걱정의 근거는 도대체 뭐였을까. 확실히 팔랑귀 친구 녀석은 조금 모자란 놈이 맞다.



붉은 벽돌로 집을 짓는 공사 현장에서 잠시간 머물며 작업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중국에서 가장 흔한 것은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조그만 평수의 단층 주택 하나 짓는데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많은 인부들이 인해전술을 펼치고 있었다. 채산성이나 효율성을 먼저 따지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빌어먹을 짓이다. 어쩌면 승자 독식, 약육강식의 잔인한 체제가 자본주의의 본래 모습일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된 신봉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 과다하게 많은 인부들과 근무 태도였다. 몇 명만 줄이면 (사실, 그 몇 명이라는 인력은 아무리 봐도 있으나 마나 한 존재들이었다), 경영 측에서는 비용절감이 될 것이고 노동자들도 상대 수입이 올라갈 터인데 참 미련한 짓들을 하고 있다 코웃음이 나왔다. 휴식 시간 개념도 없이 한쪽에서는 열심히 일하는데, 또 한편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거리낌 없이 농을 치며 담배를 꼬나물고 농땡이를 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제재를 하거나 나무라지를 않았다.이 생경스러운 장면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이질감보다는 오히려 경이롭기까지 했다. 한심, 조롱, 비아냥은 자본주의로 찌든 내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 텐데, 녹아든 '만만디'의 실제와 맞닥 뜨리니 왠지 일방적 매도는 경우가 아닌 것 같았다.


도로공사 현장을 만났다. 여지없이 바글거리는 인간 떼들의 효율성 없는 작업 현장이었다. 주택건설 현장과는 달리 불도저나 굴삭기 같은 중장비도 몇 대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인해전술과 천불 나는 여유로움은 여전했다.
공산경제 체제의 한계 탓인지 민족 특유의 속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몇 량이나 줄줄이 달아메었는지 끝없이 늘어 선 삼등열차의 칸칸에는 만고 할 일 없이 시간만 죽치는 역무원이 칸칸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일찌감시 잊혀진 비둘기호 수준의 열차에서 저치들의 업무는 도대체 뭘까? 성글게 표 검사나 하는 게 전부일듯 싶은데, 월급은 얼마나 받을까? 한 명으로도 충분한 업무를 열댓 명이 나눠하고 있는 모양 새니까 급료는 딱 굶어 죽지 않을 만치만 받을게 확실할 거라고 확신하며, 자본주의의 냉혹하기는 하지만 고도의 생산성에 찬사가 나왔다.

경영합리화란 이름 아래 쥐어짜고 또 짜다 그마저도 부족하다 싶으면 사정없이 노동자 대학살을 감행하는 초강수를 둘 수 있는 자본주의의 결단성과 우월함에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태생부터 그런 세계에서 살아온 나의 시선에 비친 공산국가 중국의 비생산성은 한심함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순전히 착각이었다.

나의 편향된 시각은 사육 당한 꿩의 눈과 다를 바 없었다. 오로지 '돈'이라고 하는 가늠줄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니 당연히 판단의 오류는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만만디'.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체득한 그들만의 삶의 지혜와 철학을, 주마간산식의 얄팍한 지식과 오만함으로 바라봤으니 제대로 된 평가가 될 리 만무했다.

'공존!'
함께 먹고 자면서 숙고 끝에 내린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다.
승자독식의 정글의 법칙이 아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민이 부족하지만 함께 살아남는 방식. 꽃집에서는 꽃을 팔고, 화분 가게에서는 화분을... 한 명의 역무원이 열 량의 객차를 관리함으로 많은 수입을 챙기는 것보다, 수입을 나누더라도 한 명의 일자리나마 더 만들어 함께 더불어 공존하자는 의식.
열심히 일 하는 동료에 개의치 않고 게으름을 부리는 근무 자세 역시 마찬가지다. 잠시 후면 입장이 바뀌어, 그간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삽자루를 던지며 궐련을 꼬나물고, 잡담이나 나누며 땡땡이를 까던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어차피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피장파장 아닌가. 단지, 휴식과 노동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정하지 않은 것만 뺀다면, 결과치는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중국인의 삶에서 '만만디'는 유구한 역사의 산물이자 저력이다.
팍팍한 인민들의 생존을 지켜 온 '공존의 철학'이다. 느림의 미학이다.

중국 역시 돈이 최고의 선이 되는 체제로 방향을 틀었고, 철학이 바탕되지 않은 천박한 자본주의 가치관이 급격히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분배, 공존의 가치관은 성장, 독식의 달콤함으로 희석이 될 것이 자명하다.


나의 백두산 여행기는 언제 멈춰 설 지 모른다.

백두산을 향하는 길 위에서,

고작 편린 한 조각으로 용을 그려낸 내 편협한 무지가 자꾸만 발목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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