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암살자는 오늘도 이슬 맺힌 숲길을 헤맨다. 은밀히, 그리고 천천히.
푹 눌러쓴 밀짚모자, 까만 장화에 손바닥만 붉게 코팅된 장갑, 적당히 촉촉한 공기... 노련한 암살자의 새벽은 완벽하다.
살쾡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발소리, 틀림없다, 곧 암살자의 잔치가 시작될 것이다.
잔혹한 살육의 손가락 사이에서 오늘도 용케 살아남아야 한다. 나의 선조들이 기적으로 살아남아 끈질기게 종족을 이어왔듯, 오늘도 얄궂은 팔자 신의 가호만 간절히 바랄 도리 밖에 없다. 그나마 독극물로 싸잡아 대량 살상을 하지 않음을 감사해야 한다. 생존의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동족의 뼈와 살이 터지는 압사의 처참함을 곁에서 생생히 지켜보는 공포는 살아있음 자체를 저주하게 만든다. 조여 오는 공포, 새빨간 손바닥의 암살자가 눈앞에 섰다.
몇 해 전부터, 남들은 던져만 놔도 잘 자라준다는 덩굴작물을 재배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쳐다만 봐도 치밀어 오르는 화딱지를 맨 정신으로는 도무지 참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이잎벌레'
5mm가량의 까맣거나, 혹은 짙은 노란색을 한 공존할 수 없는 약탈자의 이름이다. 콩꼬투리에 '톱다리 개미허리 노린재'가 있다면, 오이, 호박, 참외, 수박의 덩굴에는 '오이잎벌레'가 있다.
꽁깍지가 막 생길 즈음, 이름처럼 날씬한 허리를 가진 노린재가 흡즙을 위해 침을 박는다. 패거리로 몰려다니면서 걸신들린 양 마구 찔러대는 침은 애써 일군 콩밭을 삽시간에 껍데기만 멀쩡한 속 빈 강정으로 아작을 낸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동생들의 밭에 심어둔 참외랑 수박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변해버린 골병든 이파리만 애처롭게 매달고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그물 같은 이파리가 흉측한 몰골을 한 채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을 하는 듯하다. 이미 관심 밖으로 버려진 참외와 수박모종은 새순을 올릴 최소한의 기력조차 사라져 버린 지 오래,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을 이어가는 중이다.
앙상한 잎맥뿐인 이파리에 뭘 또 뜯으먹을게 남았을 거라고 '오이잎벌레'가 입맛을 다시고 있다.
어쩌다 하구 많은 생명체 중에 벌레, 천덕꾸러기 벌레로 세상에 나왔을까. 그것도 남의 등이나 처먹으며 짧은 생을 잠시 스쳐가는 하잘것없는 벌레로 말이다.
내 애미는 어쩌자고 많고많은 땅을 두고 하필이면 오이 밑둥치 땅속에 나를 버려두었을까. 뿌리를 갉아먹고, 어른이 되어서는 오이, 호박 잎사귀나 탐하며 살아야 하는 비참함을 대물림하는 길을 끊어내지 못했을까.
암살자의 발자국 소리가 멎고, 잎새를 뒤적이는 사신의 붉은 공포가 눈앞을 스쳐 지난다. 숨조차 쉴 수 없다. 근육이 뻗뻗해지고 피는 진즉에 굳었다.
나는 죽음 앞에 서 있다.
날이 새고 아침 공기가 데워지기 전, 갓밝이 시간을 넘기면 허사다. 약탈자들이 밤새 이슬로 젖은 날개를 말리기 전, 비상을 꿈꿀 틈도 없이 잽싸게 노린재, 오이잎벌레를 제거해야 한다. 참외, 수박은 두 번씩이나 잃었지만, 딴에는 명색이 농부인데 오이만큼은 지켜내야 하지 않은가.
덩굴과 잎사귀의 뒷면에 죽은 듯 붙어있는 놈들을 일일이 손으로 눌러 죽여야 한다. 죽여도 죽여도 좀비처럼 지치지 않고 집요하게 공격해 오는 벌레들이 징글맞지만, 입으로 들어갈 작물에 약을 쳐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한 몸은 억만 마리 벌레보다 소중하지 않은가. 다 살려고 하는 짓이다.
아예 씨를 말리겠다며 이빨을 바득바득 갈아대는 영악하고 노련한 암살자는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을 용케도 파고든다. 개와 늑대의 시간, 으스름녘의 촉촉이 젖은 대기가 날아오를 날개를 붙들어 매는 시간이 그렇다.
유일한 방어기제인 날개를 무력화시키는 농부의 부지런함에 치가 떨린다.
저승의 강에 버티고 선 카론이 내미는 손, 동전을 달란다. 하잘것없는 벌레인 우리는 죽음조차도 녹녹지가 않다. 짓눌려 바스러진 슬픈 죽음으로도 부족한 벌레, 벌레의 지랄 같은 운명이다.
소심한 저항.
눈을 피해 오이잎벌레가 땅으로 슬며시 몸을 떨군다. 햇살 아래에서는 보란 듯 힘차게 나래를 펴고 비상했을 녀석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는, 고작 태어났던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방법 밖에 없다. 살기 위해 박차고 올라온 땅, 그 차가운 땅바닥이 그들을 살리기 위해 다시금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어쩌면 찰나보다 짧은 생애, 한 번의 화려한 비상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는지 모른다.
땅과 한 몸이 된 '오이잎벌레'가 죽은 듯이 미동도 않고 납짝 엎드려있다. 그렇게 살아도 산 게 아닌 비굴한 몰골로 그저 기다릴 뿐이다. 삶이 비굴함보다 조금도 나아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소심한 저항, 머리를 숙이고 바닥에 납짝 엎드려 은총을 읍소한 시간이, 그 비굴함이 그를 살렸다.
힘없는 애미, 애비의 비굴함이 대를 잇고,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다.
민중의 삶이 위대한 이유는, '비굴과 굴욕'을 참아냈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