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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비둘기, 동백의 품에 들다.

by 김석철


동백이 진 자리, 며칠째 후드득후드득 소낙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 피를 쏟으며 우수수 떨구어낸 동백의 빈자리에는 시리도록 퍼런 잎사귀가 화려했던 시간들을 묻으며 자리바꿈을 했다.


나는 동백꽃 하나하나를 바지런히 챙겨보지를 못했다.

흐드러진 분홍의 뭉텅이를 싸잡아 동백꽃이라 여겼을 뿐. 꽃송이를 통째로 떨구고 난 뒤에야 문득 개별적인 동백꽃 하나는 장미꽃과 빼다 박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감함에 미안한 감정마저 일었다. 군집에 함몰된 개별자의 주체성은 미뤄 헤아려볼 엄두조차 내지를 못한 내가 삶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다를 바가 없을 것이 자명하다.


쏟아져내린 동백꽃들의 빈틈으로 언제부터인지 맷비둘기 한쌍이 둥지를 틀고는 연신 푸덕대며 부산을 떨었다.

뜬금없는 불편한 동거의 시작은 떼를 이룬 산까치들의 등쌀에 떠밀린 탓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보금자리를 인간의 턱 밑으로 옮긴다는 사실은 꽤나 의외였다.

착한 똥개 용이의 그늘막이 되는 동백나무 위, 인간과 개, 고양이 무리와 멧비둘기가 적당히 외면을 하면서 더부살이를 택한 것이다.

일부 먼저 파종한 땅콩의 땅을 뚫고 올라온 새순 떡잎을 쪼아 먹으려 파헤친 잔해가 처참할 정도로 널브러진 농토. 그 가해자 중의 유력한 용의자들과 한 지붕아래 머리를 맞대게 된 모양새가 된 셈이다. 연일 반복되는 피해로 인해 호구지책으로 새총까지 만들어야 했던 농부의 입장에서는 그저 당돌하기 짝이 없는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녀석들이 아닌가. 가뜩이나 밉상인데, 대놓고 둥지를 틀고서 법석을 부려대니 눈에 가시가 따로 없었다.


"한창 번식기라서 알을 낳은 모양이네요."

농장에 들른 이가 긴 장대를 챙겨들며 동백이 품은 비둘기의 둥지로 향했다.

"어라?"

엉거주춤 나를 돌아보며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둥지 안에서 갓난 새끼 비둘기가 애미인지 적인지도 모르고 입을 벌렸기 때문이었다.

"에이, 벌써 부화했네...뭐 도리가 있나, 산 생명을 우짜겠노."


동백은 떨군 꽃잎의 자리에 새 생명을 품었다. 해할지도 모르는 농꾼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비둘기는 스러진 동백꽃잎 속으로 파고들어 새 생명을 잉태시켰다.


손에 들렸던 장대가 맥없이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땅콩이 뽑혀나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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