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저돌의 아이콘, 멧돼지와의 심야 육박전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토록 좋아하는 고구마를 한 입도 베어 물지 못하고 꽁지 빠지게 줄행랑을 친 사건은 두고두고 한이 서릴겁니다.
올해는 고라니, 멧돼지가 똥꾸녕으로 숨을 쉬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선배 농꾼들이 딱지가 앉도록 우려하던 멧비둘기, 때까치가 극성을 부려댑니다.
느지막이 심은 땅콩이 허연 속살을 드러낸 채 죄다 뽑혀 멀칭 된 깜장 비닐 위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콩나물 밭이 된 약탈의 현장에 망연히 쪼그려 앉아있으려니 또다시 슬금슬금 승부욕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계엄, 아니 조류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누가 '새대가리'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정말이지 개뿔도 모르는 작자의 헛소리가 분명합니다. 새도 새 나름, 똑똑한 녀석들은 아이큐 98 언저리인 나보다 낫습니다. 특히 까치, 까마귀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전략적입니다.
몇 해 전, 하늘의 저승사자인 매와 까치, 까마귀 연합군의 영화 같은 공중전을 손 닿을 거리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고, 덩치가 당당한 랩터 같은 매가 네 마리 연합군 편대의 파상 공세에 맥 한번 못 추고 체면 다 구기고 말았습니다.
이이제이, 성동격서, 합종연횡...
이렇게나 똑똑한 까치와의 전쟁을 선포를 했지만, 딱히 대응할 마땅한 전술은 없습니다. 조류망이 최상이기는 하지만, 한두 평도 아니고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반짝이 끈, 까불이 허수아비,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화생방 무기인 크레졸 비누액 등등 죄다 허사였습니다. 마치 보골을 채우는 것처럼 이틀 정도만 지나면 오히려 갖고 놉니다. 영악한 녀석들이 부아를 있는 데로 돋우며 비웃습니다.
일단, 원시 무기인 새총을 만들기로 합니다.
아득히 지난 어린 날 동네 형아들은 이 맘 때면 마른나무 대충 쓱쓱 깎고 샅바 고무줄 이어 새총을 만들고, 겨울철에는 녹슨 철사 쪼가리 구해다 썰매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에서 형으로, 그리고 내가 동생들에게 이어가는 끈끈한 유대였습니다.
기억을 거슬러 오릅니다. 누군가가 쇼핑몰에서 슬링샷을 하나 사라고 합니다. 레이저까지 딸린 쥐기는 재품을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면서 무식한 짓 한다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나는 단순무식한 단세포 인간이라 손발이 고생하는 뻘짓을 선택합니다. 잊힌 기억들 속에서 한때 깔깔대며 어깨동무했던 형, 동생들을 불러내 투박하고 어설픈 새총을 자랑할 겁니다.
내 새총에 곱게 맞아줄 얼빠진 까치가 어딨겠습니까. 뒷산 숲속, 새총의 사정거리를 아스라이 벗어난 소나무의 우듬지 끝에서 나 잡아보라고 일부러 요란하게 울어댑니다.
약아빠진 녀석들은 내 기척이 느껴지는 한 안전 구역에 바짝 엎드려 기회만 엿볼 겁니다.
아마, 이번 새들과의 전쟁은 제가 질 것 같습니다.
멧돼지 보다
까치가 더 똑똑한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