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청계천 고서점의 손때 묻은 책들이 토해내는 퀴퀴한 냄새 속에서 우연히 만났던 건 확실하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는가?
악인의 길은 형통하고, 선한 이는 고통으로 울부짖는데, 공의의 하나님은 왜 돌아앉아 외면하는가?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 곰팡이 냄새로 찌들어가며 내팽개치듯 어지럽게 쟁여있던 책더미들 속에서 걸어 나와 나와 인연을 맺은 건 우연이었을까?
광야의 빈 들에 홀로 선 선지자 하박국은 신의 말씀을 하향 전달하는 대언자가 아니라, 침묵 뒤로 숨어든 신을 향해 백성의 소리를 외친 자였다.
놀림감이 된 신의 부재는 악인을 더욱 광포하게 몰아갔고 압제와 핍박의 고통은 나날이 더해졌다.
"여호와여,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하박국 1;2)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
마침내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침 묵은 부재를,부재는 악인의 오만을, 그리고 신의 죽음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란 때에 숨으시나이까(시10;1)'
광야에서 절규한 선지자의 긴 탄식에 아랑곳하지 않고 침묵과 방관의 역사는 늘 악인의 편에 섰다.
적어도 '신'이란 게 존재한다면 대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선한 이의 신음과 한숨은 신의 관심 밖인 듯, 그저 공중에 외치는 흘러가는 소리에 불과하다. 언제나 그랬듯 한결같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동행한다, 같이 아파한다고 전할뿐이다.
내가 묻고, 엔토슈샤쿠 또한 같은 질문으로 따진다.
왜, 창조주는 침묵하는가!
악인은 왜 벌하지 않고, 선한 이의 고통과 분노에는 침묵하는가!
선악과로 연약한 인성에 장난질을 친 창조주는, 이제라도 '사랑과 공의'라는 스스로의 규정을 증명해야 한다.
신의 공의는 잠들었고, 악인은 직무유기 중인 신을 우스히 여기며 야만의 시대를 이끌고 있다.
창조주는, 그만 침묵을 깨고 일어서시라.
영광은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