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약방으로 향한 말자 씨.

by 김석철



옅은 미소를 머금은 말자씨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면회신청서를 쓰고서도 한참을 기다린 뒤였다.

창백한 건물과 어딘지 어색한 따로 노는 듯한 화단의 꽃들 사이를 느릿한 걸음걸이로 거니는 동안에도 사위는 온통 적막으로 짓눌려 있었다.

면회객 명단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찬찬히 훑어보았다. 한가위를 하루 지난 명절기간이라 방문객 명단은 두 쪽을 넘기며 꽤나 길게 이어졌지만 끝내 익숙한 이름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망할 년들.

지 애미가 죽다 살았는데 코빼기도 한 번 안 보이나? 독한 것들.

어머니의 독설이 등짝에 서늘하게 꽂혔다.


말자씨의 집은 용의주도하게 블록 단위로 잘 재단된 주소지에 위치해 있다. 무릎이 좋지 않아 거동이 불편한 말자씨가 가파른 계단을 기다시피 오르내리는 2층의 단칸방에 주저앉게 되기까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험한 세월을 악착같이 버티고 버틴 결과물이 고작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쪽방이었다. 늘 고요했고 적적했다.

말자씨의 집에는 문패 대신 잘 보이는 벽에 새파란 둥근 바탕에 하얀 숫자의 팻말이 붙어있다. 흡사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가슴팍에 붙들린 다윗의 별 같았다.

대문은 열린 적이 없고 옆 모퉁이를 돌아서면 어깨너비의 개구멍 같은 전용 계단이 있다.

말자씨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습관적으로 두 번을 망설인다. 나날이 가팔라지는 계단과 서늘함이 전이되는 방 손잡이를 마주할 때다.


"아고, 김 말자씨야. 농약을 드시려면 먼저 나한테 어떤 게 약발이 쥐기는지 물어나 봐야지! 농사꾼 조카 뒀다 어따 써먹을꺼요."

"그러게. 죽지도 않고. 속만 쓰려 죽겄다."

"담번에는 확실히 얘기하소, 고독성으로 한방에 훅 가는 놈으로 구해 드릴께."

"뭔 노무 지랄 같은 팔자가 죽는 것도 지 맘대로 안돼노?"

"좀 더 살아라카는 운명인갑지?혹시 아나?돈 많은 영감탱이라도 하나 붙을랑가."

"아무도 없는 방에...더 살면 머 하겠노."


말자씨에게는 딸 아닌 딸이 둘이 있다.

처녀가 유부남과 눈과 배꼽이 맞아 들어선 딸들이었다. 호적상의 두 딸은 아버지 어머니 둘 중 누구의 성씨도 갖지 못한 채 완벽한 타인으로 존재했다.

둘은 또 다른 성씨의 둘과 합쳐지고, 말자씨 슬하로 3대째가 되자 식솔은 말자씨 제외 여덟으로 부풀어 올랐다.

말자씨에게 여덟은 웬수였고, 여덟에게 말자씨는 호구이자 노예였다. 호적상 남인 두 딸은 번갈아가며 말자씨의 간까지 쪼아 먹으며 거덜을 냈다.

엄마가 우리한테 해준 게 머있노.

핏덩어리 손주마저 던져두고 집을 비우더니 결국 말자씨를 앉은뱅이로 만들어 20년이 넘도록 단칸방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호적에 이름 석자 온전히 올려주지 못한 애미의 업보치고는 너무도 혹독한 댓가였다.


씩씩했던 말자씨의 입에는 사는 게 지겹다란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집구석에 들어가기 싫어 미치겠다고도 했다.

외롭다고 했다. 분명, 외로워 죽겠다고 그랬다.

긴 세월 사지를 옭아맨 창살없는 유치장이었던 말자씨의 단칸방이 이제는 지독한 외로움을 가두었다. 인적이 끊어진 공간, 기다림이 사라지면서 인생의 설램은 완벽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하늘은 눈부시게 빛나고 가을 햇살은 따사로웠다.

그 화사함 가운데로 말자씨가 길을 나섰다.


외로운 말자씨가 따사로운 어느 멋진 날에 또렷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사장님, 그라목손 있습니꺼?"



(참; 그라목손은 지금은 사라진 고독성 농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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